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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ydney Good People  Presbyterian Church</title>
		<link>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link>
		<description>Loving God Loving People</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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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본다"고 말하는 맹인들]]></title>
			<link><![CDATA[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content_redirect=362]]></link>
			<description><![CDATA[요한복음 9:24-41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과 자신들을 맹인이라고 하는 것 으로 인해 기분 나빠하는 바리새인들이 대조됩니다. 

그리고 "본다"고 할 때 무엇을 보는가? 하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맹인은 보기는 보지만 누구인지 아직 잘 모르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인자"라고 하시자 믿는다고 고백하며 절합니다. 

이에 반해 바리새인들은 "우리도 맹인인가?"라고 반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가 너희가 맹인이 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이 상태를 죄와 연결시킵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 놀라운 기적은 그가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인데도 모세 운운하며 하나님께서 모세와 말씀하신 줄을 알지만 이 사람 예수는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며 자신들이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자들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것 .. 그래서 믿음을 고백하고 절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눈을 떴다고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바리새인들처럼 똑똑한 척 자신은 맹인이 아닌 척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맹인입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할 때에는 그 보지 못함으로 인해 고통하며 절박한 마음으로 보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한데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맹인이면서도 "본다"고 하며 우쭐대고 교만하고 이제 보게 된 사람을 앞에 두고도 자신의 맹인됨을 모르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죄"와 연결시키는 것은 큰 경고가 됩니다. 

보는 맹인과 못보는 멀쩡한 사람에 대한 이 비교는 오늘 우리안에서도 동일한 모습이고 이 일이 우리가 보고자 한다고 보게 되는 일이 아니기에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 우리의 교만과 얄팍한 지식이 우리의 눈을 가려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만들지 않는 것은 오직 우리 안에 가난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나면서부터 맹인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증언하는  것은 우리의 깨달음이나 우리의 지식이 아니라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으로 인한 것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Tue, 03 Mar 2026 08:10:2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redirect=11"><![CDATA[묵상의 나눔]]></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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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월 주보]]></title>
			<link><![CDATA[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content_redirect=361]]></link>
			<description><![CDATA[2월 주보입니. .]]></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Tue, 03 Mar 2026 07:51:0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redirect=5"><![CDATA[교회 게시판]]></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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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예언된 표적 2:19-22]]></title>
			<link><![CDATA[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content_redirect=360]]></link>
			<description><![CDATA[요한복음을 표적의책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적의 목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고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이 처음 예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어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 그래서 영생으로 들어오는 것 뿐만 아니라 이미 믿는 자들이 그들의 신앙을 더욱 더 돈독하게 하고 그들이 가진 영생을 신뢰하며 더 강하게 붙들게 하려는 목적 두 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표적들이 나타납니다. 이미 가나의 혼례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는 표적은 처음 표적으로 잘 어울리는 표적 같습니다. 처음 창조에서의 결혼식과 처음 표적으로서의 가나의 혼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해 하와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와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누군가 시에서 표현한 것처럼 물이 그를 만든 창조자를 만나 얼굴이 붉어졌다(The conscious water saw its God, and blushed)는 황홀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표적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나타날 표적을 예언하신 표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하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제자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에야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지만 그것을 표적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지만 이미 그것을 표적이라고 먼저 이름 붙여 놓았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은 너희가 성전을 헐었지만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운다는 것을 보여주신 가장 중요한 표적이 분명합니다. 

십자가에 메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조롱하는 사람들이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짓겠다던 사람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십자가에 내려와 보아라(마27:40)"라고 히죽거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신 표적대로 자신이 헐어지는 일을 그대로 다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다윗의 성전의 재건을 유대인들은 소망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돌로짓지 않고 자신의 육체로 지으신 참된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이 조롱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십자가에서 내려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그 말씀처럼 그 이전 돌로 지은 성전의 모든 돌들이 다 헐어지듯 자신의 피를 다 쏟으시며 십자가에 내려 오심을 거부하고 죽음에 이르셨습니다. 

이 허물어 짐이 참된 것이 세워지는 것이었고 그 고통당하심과 죽임 당하심이 성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그 대속의 위대한 한번으로 영원한 제사였다고 하는 것은 감히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역시 이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을 과시하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스스로 증명하려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길은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역사속에서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길을 택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내가 가진 힘이 어떤 힘인지를 보여주려고 한 때가 있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 모습은 기독교의 길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와 위대한 복수를 이루고 자신을 괴롭혔던 자들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 영웅의 길로 보이지만 그것은 십자가의 길은 아닙니다. 

이 성전은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하지 않은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지신 바로 그 십자가로 인해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죄가 사해졌고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다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성전은 건재하고 그 에덴의 임마누엘, 함께 하심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이 새롭게 세워진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Thu, 05 Feb 2026 09:57:1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redirect=11"><![CDATA[묵상의 나눔]]></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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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1월 주보]]></title>
			<link><![CDATA[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content_redirect=359]]></link>
			<description><![CDATA[2026 1월 주보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Wed, 04 Feb 2026 08:56:1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redirect=5"><![CDATA[교회 게시판]]></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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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요한 복음 개관]]></title>
			<link><![CDATA[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content_redirect=358]]></link>
			<description><![CDATA[요한복음

S. A. 쿠민스(S. A. Cummins)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경이 거룩하며 영감되고 권위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고 성경을 교회의 신앙과 실천의 상황 내에서 읽었으며, 석의적 다양성과 불일치 가운데서 통일성과 공통의 토대를 추구하였다(참조, Hall 7–42). 우리는 이러한 풍부한 유산과 관련하여 요한복음의 해석과 영향, 메시지와 모티프, 정경 내에서 역할 그리고 지속적으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되는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해석의 역사: 교회와 학계에서 요한복음의 역할

1) 초대교회

오늘날 요한복음에 대한 가장 오래된 해석은 1세기 후반 다소 고립되고 발전된 “요한공동체” 내에서 요한공동체가 구성되는 여러 단계 동안 발생된 본문의 마지막 형태 내에 깊이 새겨져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과정 중에서 분리주의자 무리들과 그들의 이단적 해석으로부터(참조, 요일 2:18–19; 4:1) 요한복음을 구체화하고 보호하려고 함께 노력한 “사랑하시는 제자”(13:23), “복음서 기자”와 편집자와 “장로”(“우리”, 21:24)와 같은 사람들이 두드러진 공헌을 하였다. 더욱이 그런 모든 정통파 노력의 결과는 2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주장된다. 그러다 초창기 열렬한 영지주의자들이 요한복음을 사용하여, 이를 경계하고 주류 그리스도인들이 요한복음을 배척했지만 이레니우스(Irenaeus; 130–200; 특별히 Against Heresies, 약 185년경)의 불굴의 노력으로 마침내 상황은 역전되었다. 이런 면에서 이레니우스는 교회를 위해 요한복음을 구출하고 회복한 것이다(참조, Sanders; Culpepper 107–38).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사도요한과 에베소교회와 소아시아와 더불어 복음서 원전과 접촉을 가졌던 2세기 독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확실히 그 때에 영지주의는 존재했으며 특별히 발렌티안(Valentinian)이 그러했고 그들은 요한복음에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요한묵시록』(Apocryphon of John), 『진리의 복음』(Gospel of Truth), 『도마복음』(Gospel of Thomas)과 다른 저작들, 바실레이드(Basilides)의 인용들, 톨레미(Ptolemy)의 서론에 대한 주석, 헤라클레온의 첫 번째 전체 주석과 데오도투스의 해석(모든 것이 약 130–80년경이다)과 같은 작품에 나타난다. 요한복음이 창조, 기독론과 구원에 대한 영지주의 입장과 다르다는 것이 확실하기에 그런 관심은 승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논쟁과 거절을 의미한다(Hill 205–93을 보라). 비슷하게 몬타니스트(Montanist)는 성령에 대한 그들의 비정통적 견해를 지지하도록 요한복음에 호소하기도 했다.
2세기 초반 요한복음에 대한 광범위한 교회적 소유권을 가리키는 것 중 상당히 과소평가된 증거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이그나티우스(Ingnatius), 폴리갑(Polycarp), 마가복음의 더 긴 결말, 장로 요한, 아리스테데스(Aristides), 파피아스(Papias), 허마스의 목자(the Shepherd of Hermas), 『사도들의 서신』(Epistula Apostolorum)과 같은 작품과 가르침에 나타난다. 요한복음의 영향력과 명성은 초기의 파피루스, 저스틴(Justin), 타티안(Tatian),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멜리토(Melito),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 『비엔느와 리용의 서신』(Epistle of Vienne and Lyons), 헤게시푸스(Hegesippus), 폴리크레테스(Polycrates), 『모라토리안 단편』(Muratorina Fragment), 아폴로니우스(Appolonius), 터툴리안(Tertullians)에 의해 입증된다. 요약하면 요한복음에 대한 익숙하고 지속적인 사용은 초대교회 내에서 요한복음이 권위있는, 사실상 정경적 기능을 하였다는 것을 드러낸다. 물론 이러한 것에 이견의 목소리(로마의 가이오라고 하는)가 분명하게 존재하기는 한다(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Braun; Hengel; 특별히 Hill을 보라).
그 이후 교회는 목회적이고 변증적 목적 두 가지를 위해 요한복음의 신학적 깊이를 계속해서 측량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215년경 사망)는 요한복음을 공관복음서와 연결하고 원본의 영감된 사도적, 공동체적 상황을 상기시켰고 요한복음의 독특한 본질을 요약하였다. “최종적으로 외적 사실들을 복음서 안에 실어야겠다고 생각한 요한은 제자들에게 재촉을 받고 성령의 신적 운행 속에 영적 복음서를 써내려갔다”(Eusebius, History ecclesia 6.14.7).
비슷하게 요한복음의 독창성을 강조하고 사복음서 중에서 최상의 것이라고 말한 오리겐(185–254)은 요한복음의 지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분간함을 추구함으로 문학적이고 풍유적 관점 양자를 수반하는 요한복음 주석을 저술했다. 그는 개인적이고 독단적인 해석을 위해 헤라클레온(Heracleon)과 같은 사람을 비판하였는데 교회적 증거는 부족하였다. 오리겐에게 요한복음은 아버지 안에 있는 바로 그 말씀을 드러내고 있기에 그것은 모든 인간적 해석을 요구한다(Schnackenburg 202–3).
3–4세기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와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서 증거되는 것처럼 요한복음은 기독론과 삼위일체 논쟁에서 아주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Pollard). 예를 들면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성육신)과 신성 양자를 주장하는 요한복음 1:1과 1:14을 연관해 대조로서가 아니라 보충으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에게 예속되었다는 아리우스(Arius)의 견해와 충돌하게 되었고 신비적 연합으로 둘을 결합한다.
크리소스톰(Chrysostom, 347–407년)은 그의 책 『요한복음 설교』(Homilies on the Gospel of John)에서 아리안주의와 논쟁하였는데 그것은 교회의 실제적 필요를 위해 요한복음의 계시적, 신학적, 영적 특성을 강조한 목회적이고 논쟁적인 상당히 영향력 있는 시리즈이다. 몹수시아의 데오도르(Deodore of Mopsuestia, 428년 사망)의 주석과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 376–444)은 니케아신조가 확인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고 그의 신성과 인성 사이의 구별 둘 모두를 지지하면서 요한복음에 많이 의존하였다(Schnackenburg 204; Wiles 129–47).
그런 강조들은 어거스틴의 중요한 『요한복음 논문』(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에서 또한 증거되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의 신비를 목회적으로 적절하게 설명한 124편의 설교이다. 어거스틴은 요한복음의 심원한 신학의 자료를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복음 저자의 특권적인 근접성(요 13:23)-그분께 기대고 그분의 모든 비밀을 받음으로 그리고 마음을 정련함으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는 복음을 출판함으로-에 돌린다. 공관복음서 기자들과 비교해 볼 때 “복음서 기자 요한은 독수리처럼 더 높이 날아 오른다. 그리고 진리의 빛을 더욱 견고히 응시하기 위해 땅을 덮은 어둡고 뿌연 안개 위로 솟아 오른다”(Tractate 15.1).


2) 중세시대에서 종교개혁까지

요한복음에 대한 교부들의 석의-동방에서는 크리소스톰이, 서방에서는 어거스틴이-가 중세시대 동안 해석을 지배하였다. 더욱 중세의 주석은 교부들의 자료를 단순하게 모집하고 요약하는 형태로 나타났고 요한복음에 집중한 다수의 작품들이 있다(Kealy 1).
부주교였던 비디(Bede, 673–735년)는 요한복음 서두에 관한 소책자를 적었고 알쿠인(Alcuin, 740–804)은 넓게 유통되고 많은 개정판이 나온 주석을 펴냈다. 요한 스코투스 에리게나(John Scotus Eriugena, 810–77) 또한 요한복음 서론에 대한 소책자와 완성되지 않은 주석을 남겼다. 그 이후에 비잔틴 주석가인 데오폴럭투스(Theophylactus, 1050–1125)도 주석을 남겼다.
또한 수도사인 루퍼트(Rupert, 1075–1129)는 800페이지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것은 어거스틴의 노력을 인지하고 보충하기 위해서였으며, 고대 기독론적 이단들과 논쟁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숙고하고 있다. 보나벤츄라(Bonaventure, 1217–74)는 자체가 신적인 말씀(1:1–6) 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인성과 결합된 것으로서(1:7–21:25) “장엄한” 복음을 반영하는 저 유명한 『요한복음에 대한 간단한 주석』(Postilla on the Gospel of John)과 더불어 이단에 응대하기 위해 작품을 남겼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74)의 요한복음 주석은 학문적으로 중세 최고의 석의이다. 그것은 오리겐,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을 광범위하게 인용하며 아리안주의로부터 펠라기안(Pelagians)까지의 모든 오류를 반박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것은 또한 조심스럽게 본문의 문자적(의도적) 의미를 수반하고 있으면서 그것의 3중적인 영적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요한복음으로부터 이끌어 낸 중요한 주제들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사랑, 성육신, 구속하심,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 요한복음의 참된 진리, 권위와 명상적인 무게 등을 포함한다. 그 이후 중세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는 복음서 기자 요한을 위로부터 자세히 조사하고 숙고되고 전파된 것으로 묘사하기 위해 친숙한 독수리 이미지를 사용했으며, 그의 말씀의 복음은 굶주린 인간성의 허세와는 반대로 육신이 되었다(Kealy 1:115–84).
요한복음은 또한 종교개혁 시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516년부터 1555년에만 30여명 이상의 저자들이 요한복음에 대한 125개 이상의 개별적 인쇄물을 출판하였으며 그 중에서 많은 것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유명한 『요한복음에 관한 석의』(Paraphrase on John)를 쓴 에라스무스(Erasmus 1469–1536)는 1519년 그의 라틴어 번역판에서 요한복음 1:1을 불가타성경의 “말씀”으로 하지 않고 “담화/강화”(Speech/Discourse)로 적음으로써 논란을 일으켰다. 요한복음에 대한 첫 프로테스탄트 주석인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은 이것을 발전시켜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연설”(oration)이라고 하였다. 그는 어떤 구절을 읽을 때 기독론적이고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함으로써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을 추종했다. 그는 또한 아퀴나스의 학문적 주석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 당시 사람으로서 그는 요한을 르네상스 역사가 중 한 사람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경건한 수사학자로 간주하였다. 다른 중요한 작품들은 마틴 부쳐(Martin Bucer, 1491–1551), 프랑소와 티털먼스(François Titelmans, 1502–37), 볼프강 머스큘러스(Wolfgang Musculus, 1497–1563) 등이 포함된다(Farmer를 보라).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요한복음 주석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신약성경 중에 영예로운 자리를 이 책에 돌렸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약된 초점이 그분의 신성과 구원의 의미를 강조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 탐구하였다. 존 칼빈(John Calvin, 1509–64)도 요한복음을 다른 복음서들을 이해하는 열쇠로 보았으며 그 안에 담긴 풍부한 기독론을 선호하였다. 전형적으로 그의 주석은 신적 의도와 본문이 가진 변화의 영향력에 주목하고 있다(Kealy 1:203–74; 참조, Larsson).


3) 계몽주의로부터 현재까지

계몽주의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성경학, 특히 예수와 복음서와 관련하여 점차 이성적이고 역사적이며 가끔은 회의주의적인 접근이 늘어나게 되었고, 이는 요한복음에까지 미쳐 이것의 역사적 가치와 독특한 신학적 본질마저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마가복음과 같은 복음서가 원래의 환경과 유대인 예수님의 활동에 우리를 더욱 가깝게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이듯 매우 색다른 책인 요한복음도 대부분 더욱 낯설고 헬라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후기 “공교회 기독교”(Catholic Christianity; 초대교회의 케그리마에 의한 지도력, 사람에 의해 임명된 직분자의 부재에서 점차적으로 임명된 지도자에 의한 지도력과 직분자와 교회구조가 형성되어 발전한 기독교-역주)가 신학적으로 가미한 구성으로서 생각된다. 그러한 견해는 1820년의 영향력 있는 브렛슈나이더(Bretschneider, 1776–1848) 주석과 바우어(F. C. Baur, 1792–1860)와 스트라우스(D. F. Strauss, 1808–74) 아래서 튀빙겐학파의 광범위한 작품에서 더욱 넓게 증거된다. 그것은 요한복음의 저자, 연대, 목적, 통일성과 의의에 대한 회의주의 입장의 증식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좀 더 온건한 입장도 존재하였다. 1832년 강의에서 슐라이에르마허(F. Schleiermacher, 1768–1834)는 요한복음을 예수님의 “심오함과 본질”을 보여주는 신뢰할 만하며 진실한 증거로 간주하였다. 1,500페이지의 방대한 주석을 남긴 프레드릭 룩케(Friedrich Lucke, 1791–1855)는 요한복음을 진정한 사도적 복음서로 간주하였으며 역사적 내용과 영적인 이해를 결합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1881년의 웨스트콧(B. F. Westcott, 1825–1901)주석은 요한복음의 사도적 기원을 방어하였고 세상(1:19–12:50)과 자신의 제자들(13:1–21:25)을 향한 그리스도의 자기-계시에 초점을 맞춘 것을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분석하였다. 20세기 초까지 학자들은 요한복음을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이며 복음에 관한 2세기의 헬라적 진술로 간주하였으며, “실제적” 예수님이라기보다는 “관념적”으로 그리고 있다(참조, Kealy 1:357–471)고 생각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요한복음에 대한 학계의 해석은 상호 연관된 문제들의 특별한 것들에 관한 경쟁적이고 미묘한 차이가 나는 주장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주로 요한복음의 배경, 공관복음과의 연관, 자료들, 구성과 공동체 상황이다. 불트만의 영향력 있는 주석(1941; 영어 번역은 1971; Ashton을 보라)은 지중해 영지주의에서의 배경에 대해 논쟁함으로 종교사학파와 헬라적 접근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대신에 요한복음의 유대주의 배경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올바르게 인지한다. 요한복음은 1세기 팔레스틴의 지리, 관습과 문화와 아주 익숙해 있다. 요한복음의 언어와 이미지는 사해문서에 의해 입증되는 것처럼 유대주의 요소와 근접한 병행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이런 동일한 증거는 요한이 실제로 요한복음 자체의 초기와 진정한 예수님 자료들을 보존하였다는 것을 잘 암시하며 공관복음으로부터 신뢰할 만하고 독립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Dodd). 요한복음에 대한 이 “새로운 전망”은 연대, 사도적 저자성, 역사적 예수님에 대한 증인과 같은 기본적인 생각을 다시 하게 하며(Robinson), 그것은 부가적 제안을 위한 분명한 토대로서 광범위하게 취해질 것이다.
공관복음에서 끌어내었다기보다는 요한은 일반적 전통, “이적,” “담화”와 다른 자료들을 사용하였을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편집자에 의해 구성됐을 것이다(참조, Fortna). 사도적 저자의 근본적인 증인을 요구하기보다는 요한은 순차적 구성과 요한공동체, 집단 혹은 학파로서 추정되든지 공동체적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 일반적인 논의이다(Martyn; Brown).
이러한 확장되고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가설들로부터 생긴 순이득을 경시하거나 잊어버림 없이, 나는 초기 주석가들이 요한복음 메시지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한 신학적 근본 관심사를 그들이 매우 자주 빗겨가고 주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행히 요한복음에서 내러티브, 상징, 신학적 그리고 영적인 특성에 관심을 가짐은 이제까지 간과한 것과 불균형을 교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예를 들면 Kelly와 Moloney; Schneiders; Thompson).


  2. 메시지와 모티프: 요한과 신적 생명의 드라마

요한복음은 인류와 세상의 구속과 재창조를 계시하고 규정하는 2막의 신적 드라마를 서술한다. 서막은 신적 생명과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말씀이 세상 안으로 들어옴을 밝힌다. 제1막에서 신적 뜻은 순종의 사역과 말씀 안에서 드러난다. 제2막은 예수님의 탄생, 죽음과 부활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후기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세상에서 신적 생명을 계속 구현해 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참조, Smalley 141–54).


1) 서막: 하나님, 말씀과 세상(1:1–18)

서막은 신적 드라마에 드리운 막을 들어올린다. 초월적이고 원시적인 장면은 하나님으로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교제 안에 계신 선재하신 말씀을 소개한다(1:1–2). 이것은 신적 생명이며 후에 우리는 성령을 포함한다는 것을 안다(1:32). 이 삼위일체적 친교로부터 나오는 공동 창조주이신 말씀은 자신 안에서 유지되고 조명되는 신적 생명과 빛을 가진 인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함과 함께 창조된 질서를 만들었다(1:3–4).
하지만 이 모든 것과 더불어 말씀은 또한 “그/이”(1:2)로서 확인된다(Kelly와 Moloney 34–35). 하늘에서부터 땅의 영역으로 장면이 놀랍게 바뀌면서 우리는 현재의 어두운 세상을 극복하기 위하여(1:5) 공동 창조주가 인간으로서 창조와 역사 안으로 들어가신 것을 발견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1:14). 이 놀라운 사건의 첫 번째 목격자는 세례요한이며 그는 신적 빛이 나타나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며 그를 통하여 믿게 되었다(1:6–7, 15). 하지만 동일하게 놀라운 것은 세상은 자신의 창조자로서 말씀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은 그들이 그분의 것이라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1:8–11) 그분을 거절함으로 그들 자신은 참된 자신을 부정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말씀의 신적 기원, 정체성과 구원하시는 사명을 수용함으로 그의 이름을 믿고, 그리하여 그들은 단순히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1:12–13). 말씀이 신적 영광과 진리로 충만하게 성육신하신 방법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세상과의 관계 양자에서 더욱 독특하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 독생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다(1:18). 그리하여 서막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목적을 증거하고 수신자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다(20:31). 이러한 방법에서 그들은 “은혜 위에 은혜(토라의 주어짐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주심까지 추적할 수 있는 신적 구속의 성취하심)”(1:16)의 수혜자가 될 것이다. 일어나는 모든 것의 규모로 볼 때 그것은 드러냄, 증거와 믿음의 고백으로서만 분간할 수 있는 것이다(“우리가 보니,” 1:14).


2) 제1막: 하나님 아버지는 사역과 말씀 속에서 아들 예수님을 드러내셨다(1:19–12:50)

서막의 신적 패턴과 목적은 1세기 이스라엘 내에서 예수님의 공적 직무에 관한 출현과 드러남과 더불어 가시화하는 것이다. 제1막은 예수님의 계시적이고 회개시키는 사역과 말씀(이적과 담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은 대표적인 인물들과 그룹들 간 일련의 만남을 포함하는데 이들은 점차 그분을 거절하거나 따르는 자들로 나뉘어진다. 이러한 매우 격렬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중요한 문제와 주제가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처음에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직무를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 신적 생명이 세상으로 오셔서 전적으로 기대하지 못하고 자기희생의 방법으로 그들에 대한 기소장을 다시 적으심으로 그들을 완전한 버려짐에서 건져 내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주 열정적이지면서도 아직 깨닫지 못하는 자신의 새로운 동료를 부르신 후에(1:35–51) 예수님은 도발적이고 의미심장한 에피소드의 연속으로 이스라엘의 일상적인 풍습에 도전하신다.
가나에서 유대주의 정결예식은 신적 영광의 새로운 포도주로 변한다(2:1–12). 예루살렘성전에서 사건은 회복 불능이며 종결된 유대주의 조직이 예수님 중심적이며 성령으로 보충된 포괄적인 공동체로 대체된다는 것을 예시한다(2:13–22). 전형적이고 너무나 자기 확신에 찬 니고데모(“우리가 아나이다,” 3:2)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님과 성령의 모습으로 “위로부터” 오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여야 한다(3:1–21). 사마리아 여인은 구원은 유대인에게서가 아니라 신적 계획 내에서 모든 신실한 예배자들에게 이르며 그들을 포함하시는 메시아 예수께로부터 나온다(4:1–42). 이 놀라운 시나리오는 믿는 이방인 신하와 예수님의 연속하는 추가적 만남에서 더욱 확장된다(4:46–54; 참조, Kelly와 Moloney 61–114).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은 더욱 다방면에 걸친 연속이 나타나는데 모든 것은 다양한 상징적인 유대주의 축제의 배경에 대항하여 두드러지게 놓인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고침을 통해 거룩한 날과 그 날의 주인을 압박하는 “유대교”를 비판하고 계신다. 또한 아들이신 그가 새롭고 권위 있으며 생명을 주는 방식으로 아버지를 드러내고 계신다(5:1–47). “유대교”의 불합리한 반-셈족 이해의 견해에서 볼 때 요한복음에서 이 구절은 예수님 안에서 신적 경륜을 대적하거나 혹은 가까이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암호이다.
유월절이 가까이 온 때에 오천 명을 먹이심, 물 위를 걸으심, “하늘에서 내려온 떡” 강화,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신적 기원(“나는…이다,” 6:35)과 자신의 백성을 위해 한량없는 공급하심을 드러낸다(6:1–71). 초막절은 예수님의 연속하는 성전 가르침을 위한 배경이 되며 그분을 체포하는 데 실패한다. 세상의 빛, 다가오는 죽음, 제자도, 아브라함에 대한 강화와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만나는 사건이 계속된다(7:1–9:41). 이런 모든 사건들에서 참되고 살아 있는 생수, 빛, 영광스러운 신적 현존(“나는…이다,” 9:12)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들다,” 8:28)과 연관된 분은 성전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신적 사역은 참된 자유, 판단, 증거와 예배에 영향을 미치며 이것은 삶, 사랑과 진리로 특징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러 일으킨다.
수전절(하누카, 10:22)에 대한 언급의 한쪽 면에서 우리는 선한 목자에 대한 예수님의 담화와 “유대교”가 그분을 거부하는 기사를 보게 된다(10:1–42). 후자는 이전에 이스라엘의 이전의 실패한 지도자들과 연결되고(겔 34장) 풍성하신 영원한 생명에서 모든 인간적 요구와 논쟁을 극복하는 아들의 대속적 자기희생에서 아버지의 이기심 없는 사랑의 부어주심과는 대조된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와 나(예수님)는 하나이다”(10:30)고 하신 신적 생명으로부터 기원한다. 이 주장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호하기 위한 관심을 가진 자들로부터 신성모독의 고발을 초래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10:38)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깨닫는 데 실패한다.
두 가지 보충적인 장면-나사로를 살리심(11:1–57)과 마리아가 예수께 기름을 부음(12:1–8)-은 제2막의 주제인 그분의 역설적인 죽음과 부활을 예기한다. 하지만 제1막은 예수께서 극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심, 이방인과 유대인과 대화하심 그리고 날짜를 추정하려고 그분의 직무를 곡해하는 것에 대한 요약으로 마무리한다(12:12–50).


3) 제2막: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화롭게 되신다(13:1–20:31)

제2막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다가오는 죽음과 그 후의 제자들의 역할에 대하여 자신의 제자들을 준비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알게 된다(13:1–17:26). 그런 사건들 후에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부활을 포함하는 사건들의 점층적인 묘사가 즉각적으로 뒤따른다(18:1–20:31). 사역과 말씀에서 아버지와 성육신하신 아들의 관계는 예수님의 수치스러운 죽음, 놀라운 입증과 영원한 신적 생명의 부활에서 그분들이 공유한 영광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인지된다. 다시 한 번 모티프의 부요함이 전체를 통해 분별된다.
유월절과 자신의 때가 가까웠다는 양자와 더불어 하나님의 바로 그 어린양은 자신의 희생을 예상하시고 자신이 종이 되셔서 겸손하게 제자들의 발을 씻으심의 방법으로 제자들의 몫을 위하여 그들을 준비하신다. 배신자 유다와 이해가 부족한 제자들이 참석함으로 이 행동은 예수님의 본이 되심과 무한하신 사랑을 표현한다(13:1–38). 이것은 또한 궁극적으로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신적 환대의 표시이다(“내 아버지의 집,” 14:2). 이것은 예수께서 떠나심과 거하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실 성령의 오심으로 가능하게 될 것이다(14:1–31). 이 모든 것에서 그 자신이 “길과 진리와 생명”(14:6)되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의 제한된 시야를 넓히도록 권면하신다(“일어나라 우리가 우리의 길에 서자,” 14:31 NRSV). 그리하여 그분은 비록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서이지만 그들에게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영역 안의 집을 향해 자신을 따르도록 불러내신다(Kelly와 Moloney 270–306).
예수님과의 연합(“참 포도나무”)과 그분이 보내신 성령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며 사랑과 기쁨의 열매 맺는 삶이 가능하도록 한다. 이것은 증오에 차고 타락한 세상의 무익한 실존을 극복하게 할 것이다(15:1–16:3). 예수님은 신적으로 예정되었으나 아직 혼란스러운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시고 자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그것의 유익을 고려하심으로 이러한 주제들을 발전시키신다. 십자가는 세상의 죄와 불의를 폭로하고 근절할 것이며 성령은 사랑, 기쁨과 평화의 형태로 아버지의 무한한 새 언약의 삶을 가져올 것이다(16:4–33). 그런 다음 기도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 제자들을 위해, 모든 신자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소망과 두려움을 함께 묶으며 아버지와 그 자신의 영원한 교제 안으로 그것들을 이끌고 가신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순종적인 직무 안에서 발견되며 아버지와 아들 사이 상호영화와 더불어 다가오는 “시간”에서 절정에 이른다(17:1–26; Kelly와 Moloney 307–51).
역설적이게도 배신, 예수님의 체포, 심문과 죽음에서 인간의 자기 파괴적 계획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대한 계획 안으로 흡수된다. 겟세마네에서 아주 확신에 찬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정체성(“내가 그로다,” 18:6)을 당국자들에게 드러내시고 자신의 “아버지께서 주신 잔”(18:11)에 복종하신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버림받으며, 심지어는 베드로도 그를 부인한다(“나는 아니라,” 18:17). 닫힌 문 뒤편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자신이 성전과 회당과 세상에서 하나님에 관하여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관계에서 자신에 대하여 항상 공개적이고 올바르게 이야기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18:19–24). 당혹한 로마 총독 빌라도(“내가 유대인이냐?” 18:35)는 자신이 기이하지만 죄없는 것 같은 “메시아”와 최고조의 갈등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그분은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18:28–38상)라고 빌라도에게 정확히 알려주신다.
모든 관련된 것을 벗어나고 뒤엎는 신적 논리는 드러난다. 거짓된 “유대인”은 가이사가 그들의 왕이라고 선언한다. 역설적이게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름으로 경의를 돌린다(19:19–22).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과 숙명을 밝히시며 그리하여 하나님을 드러내시며 영광스럽게 한다. 그러므로 비록 상황은 빼앗긴 제자들에게 재앙으로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역전이 된 입장이다. 빈 무덤은 다시 나타나시고 “주와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시며 성령을 남겨두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입증하며, 성령의 형태로 그분은 자신의 제자와 계속해서 함께 하실 것이다(20:1–29). 그런 후에 그분은 “내 아버지 곧 나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20:17)께로, 예수님,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께서 주신 신적 생명을 믿고 받는 모든 자들이 기쁨을 누리도록 영광 중으로 승천하신다(20:30–31).


4) 후기: 몸을 입은 신적 생명(21:1–25)

아마도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추정되는 후기에서 예수는 다시 나타나시고, 신실한 증인으로 남고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도록 하기 위하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를 포함한 그의 모인 제자들에게 자신을 다시 권면하신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이 영적인 복음을 제공하였는데, 이 복음은 청중들을 초청하여 예수와 사도들과 신적 생명을 가진 모든 성도들과 연합할 수 있게 한다.


  3. 정경: 요한복음과 거룩한 동료문헌들

요한복음은 신앙에 관하여 증거하는 공동체 내에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상기되는 것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에 의해 형성된 계시적이고 영감된 새 언약 문서의 역할을 한다(참조, 14:25; 20:21–23, 30–31; 21:24–25). 이러한 기초 위에 저자와 최초의 청중은 이 신적으로 권위있는 성경을 보존하고 전달하고 선포하였다(참조, 2:22; 19:36–37; 20:31). 이 복음서가 정경으로 수용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학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이 초대교회에서 넓게 수용되고 인정되었다는 것과 그것이 독특하고 두드러지고 실제로 정경적 역할을 했다는 암시가 존재한다(Hill을 보라). 이런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요한이 구약성경을 사용했다는 점 그리고 초기 요한전집과 공관복음서 둘 사이에 놓인 관련성이다.
요한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예수님 안에서 세상과 그분의 성령으로 권능을 받은 제자들에 대한 그것 자신의 증거를 보았다는 것은 구약성경과 일치한다(5:39, 45–47). 이것은 예수께서 다양하게 인용하시고(1:51; 6:45; 10:34; 13:18; 15:25), 그 당시 유대주의자들(1:23; 2:17; 6:31; 12:13) 그리고 이 저자가 인용(12:15, 38, 40; 19:24, 36–37)한 구약성경의 인용 특히 모세오경, 이사야와 시편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분명해진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예수님의 메시지와 직무에 대한 요한의 설명이 다양한 구약성경 요소들에 대한 예표론적이고 논쟁적인 재직업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상징(토라, 성전, 안식일), 인물(모세, 이사야의 종, 시편의 고난 겪는 의로운 자, 에스겔의 다윗적 목자), 이미지(포도주, 물, 빛)와 절기(유월절, 초막절) 등을 포함한다. 그리하여 요한이 선지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전체 구약성경에 관하여도 참이 된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12:41). 부활 후의 요한의 관점에서부터 이사야가 미리 보고 구약성경이 예상하고 약속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 표현이신 십자가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이다. 결국 이것은 구약성경, 예수님 그리고 요한복음의 집합적 증거의 중심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요한복음만이 아니다. 이 문서는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들, 특별히 요한이 기록한 서신들과 요한계시록과의 비교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복음서와 특별히 요한1서 사이 아주 많은 놀라운 단어적, 개념적, 주제적 유사성이 잘 인식되는 배치는 우연이라고 하기 힘들다. 예들 들면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 보혜사와 “진리의 성령님,”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자들, 사랑의 계명, 빛과 어두움의 이미지, 진리, 증거와 영생에 대한 강조,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 머물라는 권면 등이 이런 것들이다.
이러한 요한서신의 수신자들 모두는 처음부터 복음서 그 자체를 통하여 듣고 보았을 것이다(참조, 요일 1:1; 2:7, 24; 3:11; 요이 5, 6). 요한계시록이 복음서라기보다 편지의 형태로 기록된 묵시적 예언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두드러진 기독론적(양, 말씀)이고 종말론적인 유사성이 있다. 그것은 유사한 두드러진 주제들(증거, 계명의 준수, 극복, 영광스럽게 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구약성경 언어와 이미지를 광범위하게 환기시키도록 이끌어낸다(참조, Bauckham, Revelation; Keener 1:122–39; Köstenberger 203–5).
더욱이 학계가 요한복음, 요한서신들과 요한계시록에 대한 기원과 정체성을 보통 개별적인 것으로 고려하지만, 거기는 또한 그것들이 권위 있는 전집에 속하였다는 2세기 초 교회의 자각에 대한 강한 증거가 있다. 이런 진술은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요한문서들의 일반적이고 가끔은 상호본문적 석의에 의해 확증될 것이다. 그것들은 암시적, 명시적으로 저자를 동일 인물, 즉 사도요한으로 본다. 이러한 요한문헌들을 포함하는 사본들이 존재할(Hill 451–64) 가능성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요한복음의 명백한 독특성은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마태, 마가와 누가를 서투르게 따르기보다는 그것이 독립적으로 나타났다는 결론에 이르도록 한다. 그것의 시작부터 요한은 특별히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이고 말씀이신 예수님에 관한 많은 것들을 전제로 하며 이것은 공관복음서 같은 문서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Smith). 초대교회와 발전된 그리스도인 공동체 사이의 광범위한 조직과 복음서 각각이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해 의도되었다는 개연성에서 볼 때, 그것들이 다른 각각에 대하여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더욱 그럴 듯 하다.
사실 2세기 증거(Tatian과 Clement로부터 그런 것처럼)는 교회가 마태복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대한 완전한 지식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요한복음이 곧 그들 가운데 배포되었다는 것이며 그것은 의도적으로 가장 마지막에 자리하는데,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의 짝을 위하여 더 넓어지고 깊어진 신학적 틀을 분명하게 하고, 확대하고 보충하며 제공했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독자는 요한복음을 복음서 중의 복음서로서 읽도록 초대되며 요한복음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 구약성경 내에서 완전한 문서로 간주하도록 한다.


  4. 요한복음과 신학: 하나님, 교회 그리고 세상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즉 요한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기원에 대한 요한복음 자체의 사도적이고 공동체적 문맥 내에서 가장 먼저 증거된 것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요한복음의 발현, 점차적으로 초대교회 안으로 포함되고 확장된 후 요한복음의 신속하고 광범위한 수용, 성령으로 형성된 성경으로 가장 초기부터 간수되어 상호 연관되게 하는 해석적이고 정경에 포함된 요한문헌들, 교회역사와 일반역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요한복음이 끼친 심오한 영향, 해석, 해설, 제정 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은 단순한 인간적 추측과 이기적 분파주의의 읽기에서가 아니라 항상 교회적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그로 인하여 온 세상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희생적이고 무한하신 사랑에 대한 풍성한 증거로서 증명된다(3:16; 21:24–25).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이 영광스러운 사랑은 모든 것을 선행하고 초월하며 창조하고 발생시키며 유지하고 성취한다. 성자 하나님 안에서 이 사랑은 그것이 죄와 죽음을 폭로하고 극복하는 것으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형을 받으셨으며, 그것이 생명의 길을 열어놓고 가능하게 하신 것으로 입증되고 영광스럽게 되셨다. 아들의 계속적인 현존인 성령 안에서 이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세우시고 내주하시며 지탱하시고 증거하시며 인도하신다(참조, Kelly와 Moloney 388–94).
세상에서 교회와 그것의 사명을 다스리고 입증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적인 사랑이다. 교회는 현존하며 신실하고 주는 곳이다. 그것은 치료하고 도우며, 견디고 탐구할뿐 아니라 직면하고 변화되어야 한다. 그것은 또한 손을 내밀고 초청하며 모이고 환영하며 포함하는 곳이다. 확실히 그런 사명은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의 방향으로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반대로 까다로운 편협주의로 퇴보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항상 이러한 하나님의 교회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인류가 그것의 참된 정체성과 숙명을 알 수 있는 천상의 영역과 경륜을 드러내는 긴요하면서 상처 입기 쉬운 사랑과 신실함과 더불어 모든 교회의 장엄함 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체화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입에 담기도 싫은 추악한 악에게 예속된 세상은 섭리 중에 구원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질 것이며 영원한 신적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S. A. 쿠민스. (2011). 요한복음. In 케빈 J. 벤후저 (Ed. &amp; Tran.), 신약의 신학적 해석: 신약 각 권 해석 연구 (초판, p 83쪽 – 101쪽). 기독교문서선교회.]]></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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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창 3:8을 묵상하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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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이 구절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익숙하면서도 그냥 스쳐 지나가게 만들기도 합니다. 창조 기사에서 많이 사용된 단어들이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날
바람이 불 때 /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
소리 
아담과 그의 아내
여호와 하나님의 낯/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 
동산 나무
빛이 있으라/ 숨은지라 

마치 창조의 첫날을 거슬러 다시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모세가 단순하게 이 상황을 하나님께서 좀 시원한 시간인 아침 일찍이나 저녁 해가 질 때 동산에 찾아 오셨다고 표현하기 위해 바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지 의문이 듭니다. 특히 이 단어 바람은 하나님의 신을 표현하는 단어이기고 하나님의 임재를 강력하게 시사하는 단어로 성경 처음에 사용된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그 상황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셨듯 그 에덴 동산을 운행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던 그 여호와의 소리도 그렇습니다. 이 소리가 어떤 존재의 인기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음성으로서의 소리가 분명하고 그렇다면 이 소리도 창조 기사에서 반복되었던 그 말씀과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했다는 것은 우리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의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하필 동산나무라고 표현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생명 나무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의 연결을 생각하게 합니다. 
숨겨졌던 창조 이전의 상태를 빛이 있으라고 드러내시고 그 창조의 시작을 하셨는데 이제 이 인간들이 숨어드는 어둠 속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죄가 가져온 참담한 결과가 단순히 숨었다는 것에 포커스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엄청난 결과를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생각은 성경을 묵상하며 드는 생각이기에 연구가 더 필요해 보이지만 성경을 기록한 모세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인간의 범죄가 가져온 창조 세계에 가져온 전반적이고 치명적인 결과들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하나님의 회복 역시 성령과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이루어지며 다시 그 얼굴 빛 앞으로 나아가며(계 22:4) 다시 생명 나무 사이를 거닐며 누리고(계22:2) 다시 숨을 필요가 없기에 밤이 없는(계22:5)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이 놀라운 창조 세계의 온전한 회복을 기다립니다.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릴 뿐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Mon, 05 Jan 2026 08:05:4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redirect=11"><![CDATA[묵상의 나눔]]></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믿음대로 살아가라!]]></title>
			<link><![CDATA[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content_redirect=355]]></link>
			<description><![CDATA[2026년은 믿음대로 살아가자(롬 12:1-2)는 주제로 나아갑니다. 
믿음으로 살자는말은많이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보면 우리가 믿음을 말하면서도 그 말과 참 많이 다른 삶을살아가고 있습니다. 

올 해에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삶과 일치되고 우리의 삶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좀 더 담대하고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믿음을 드러낼 때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Sun, 04 Jan 2026 08:59:3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redirect=5"><![CDATA[교회 게시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창세기개관]]></title>
			<link><![CDATA[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content_redirect=354]]></link>
			<description><![CDATA[창세기

고든 J. 웬함(Gordon J. Wenham)


  1. 서론

성경의 첫 번째 책으로서 창세기(헬라어로는 “기원”의 뜻)는 구약의 다른 어떤 책보다 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위한 배경이 될 뿐더러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 중 하나이다. 창세기는 성경을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상황과 신학에 대한 적절한 전제를 갖고 나머지 부분을 읽도록 방향을 설정해준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많은 저자들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오늘날 세속화된 서구에서도 그 이야기와 주제들은 여전히 익숙하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것이 해석에 있어서의 통합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상황에서 유리된 텍스트는 오해와 오용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이 책의 목적은 창세기를 기록 시의 텍스트로서와 정경 속의 주된 증거로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2. 해석의 역사

“창세기의 처음 몇 장은 구약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 기독교 신학의 발전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Louth 36) 초기 기독교 저자들은 신약을 필두로 해서 창조와 타락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의 도입부를 깊이 파고들었다. 첫째 아담의 실패를 승리로 되돌리신 둘째 아담으로서 그리스도를 유형화하는 것은 교부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이해 또한 필수적이었다. 이런 형상은 타락으로 인해 손상되었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새로운 형상으로 이를 되돌리는 것이었다.
상징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창세기를 해석하는 데 있어 중요했지만 이것이 이야기들을 풍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창세기의 내용들은 세상의 기원을 문자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찬가지로 이후의 족장들의 이야기들은 역사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여졌다. 현대과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19세기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성경해석에 어려움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개혁주의자들과 그 계승자들은 창세기를 동일하게 문자적인 방식으로 접근했으며 책의 상징적 내용에는 그리 강조점을 두지 않았다. 당시에는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계몽주의가 동튼 17세기 이후부터 이런 전통적인 관점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신학과 정치에 관한 논문(“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에서 에스라가 모세의 자료를 통해 모세오경을 편찬했다고 주장했다. 창세기에 대한 토론의 결정판은 아스트룩(Astruc)의 『창세기를 편찬하기 위해 모세가 사용한 추측들』(Conjectures on the Memoires Used by Moses to Compile Genesis)이다. 이 책은 창세기가 몇 가지 유사한 자료를 통해 편집되었다고 주장한다. 창세기와 모세오경의 다른 책들이 몇 가지 자료들로 구성되었다는 생각은 19세기에 걸쳐 격한 토론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율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의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서론』(Prolegomena to the History of Israel, 1878)을 재치있게 옹호하면서 한 가지 형태의 문서설이 학자들 간에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창세기를 세 가지의 주요 자료인 J문서(야웨, 주전 950), E문서(엘로힘, 주전 850), P문서(제사장, 주전 500)들로 구성된 것으로 나눈다. 문서설은 이 세 가지 문서가 연속적으로 편집되어 창세기는 결국 모세로부터 800년이 지난 후인 주전 5세기 경에 최종적인 형태를 이룬 것으로 본다. 이는 창세기에 대한 매우 회의적인 접근방식을 수반했다. 족장들의 이야기들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지 않고 “다만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때의 상황을 반영한다…창세기에는 이후의 상황들이 케케묵은 이야기의 형태로 무의식 중에 투사되어 있고 미화된 신기루와 같이 나타난다”(Wellhausen 319).
역사적 회의주의가 족장들의 기록들을 난타하는 한편 과학적 발견은 창세기 1–11장의 전통적인 이해를 훼손시키고 있었다. 초대기독교 저자들은 이 부분을 역사보다는 내러티브 신학으로서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의 연대기를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대주교인 어셔가 7세기에 이미 가정했던 것처럼 지질학의 발전을 통해 지구의 기원이 주전 4004년보다 훨씬 이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문에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해석은 문제를 안게 되었다. 한층 더 진일보한 발전을 통해 창조의 과정은 6일이 아닌 수천만 년이 걸린 것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다 다윈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 1859)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창세기에 나타나는 시간표에 오류가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라는 궁극적인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우연적 변이는 지구 상에 다양한 생명체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손쉽게 설명해 주었다. 창조주에 대한 개념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으며 계몽되지 못한 시기의 미신적 산물이었다.
창세기와 그 신학을 무지한 시대의 그릇된 개념으로 내모는 것은 창세기 6–9장과 흡사한 고대 니느웨의 홍수이야기를 담은 텍스트의 발견으로 인해 정당한 것처럼 보였다. G. A. 스미스(G. A. Smith)가 1872년에 길가메쉬(Gilgamesh)의 11번 돌판을 해독한 내용을 발표하고 그 다음에 책으로 출판했다. 스미스는 회의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그와 다른 사람들이 이룬 업적들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창세기 1–11장을 다른 민족의 창조신화와 비슷한 신뢰성과 권위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게끔 했다. 19세기의 지식인들은 서구과학이 진리의 유일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결론을 지었다.
20세기는 창세기에 보다 우호적이었다. 문서설이 가장 최근의 자료연대를 제시하며 20세기 내내 주도적인 위치를 점했지만 이 자료들 중에 확실한 초기요소들을 발견하기 위한 공동의 시도가 있었다. 알트와 웨스터만은 족장들에게 약속한 내용의 구성요소들은 매우 이른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고고학과 비교셈언어학에 정통한 학자들은(Albright; Speiser; de Vaux) 창세기에 나오는 이름 및 관습과 2000년대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명칭들과 많은 유사점들을 발견했다. 이를 통해 학자들은 창세기의 이야기들이 저작의 시기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역사적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더 회의적인 주장들(Van Seters; Thompson)이 20세기 말에 제기되었지만 고고학적인 증거들은 여전히 창세기의 진실성을 지지해주는 것 같다(Millard와 Wiseman).
창세기 1–11장과 유사한 더 많은 고대문헌들이 발견되면서(수메리안 왕의 목록, 홍수이야기, 아트라하시스 서사시 등) 창세기가 인접문화의 사고를 단순히 재생산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다. 적어도 신학적인 단계에서는 그런 생각들과 격렬하게 충돌하게 된다(아래의 “3. 창세기의 메시지”를 살펴보라).
최종적으로 20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동안 문서설에 대한 많은 반박이 있었다(참고, Whybray). 그래서 이제는 모세오경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전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최종적 형태로서의 정경적 읽기가 창세기를 비롯하여 성경신학의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자료에 관한 많은 토론을 거치지 않고 현존하는 형태로서의 책의 구조와 메시지에 대한 질문으로 학자들을 이끌었다. 이런 작업 중의 일부는 신학적 관심보다는 문학적 관심으로 비롯되었지만 이 책의 신학에 관한 매우 유익한 몇 가지 교훈들을 발견케 해주었다.


  3. 창세기의 메시지

다른 여러 책들과 마찬가지로 창세기는 구성요소들을 분리시켜서 읽으려는 시도로 인해 타격을 받았다. 문서가설을 받아들이는 주석가들 사이에서 이런 경향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J문서에서 하나님을 단순히 신인동형론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은 P문서의 초월적 경향과 대조된다. P문서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반면 E문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경향이 짙다. 구별되는 문서들에 대한 이론과 합쳐진 주석가들에게서 창세기의 신학을 전체로서 파악하고 상충되는 불협화음과 반대되는 여러 목소리들의 화합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창세기를 좀 더 전통적인 시각에서 읽으려는 사람들은 책의 일부분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리스도인 주석가들은 신약과 이후의 신학들의 중요성 때문에 창세기 1–11장에 불균형적인 주의를 쏟는 경향이 있다. 한편 유대인 독자들은 창세기가 유대인들의 기원과 이스라엘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말해주기 때문에 족장들의 이야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하지만 텍스트에 충실하기 원한다면 특정한 부분에 우선을 두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부분들을 살피면서 부분의 메시지를 전체의 그림에 통합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4. 창세기의 구조

창세기의 전체적 일관성은 주의 깊게 펼쳐지는 책의 구조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첫 부분에 나타나는 창조기사(1:1–2:3)에 이어서 동일한 제목(톨레돗, toledoth)을 가진 열 가지 이야기들이 그 뒤를 이어가고 있다. “이것이…의 내력이니”(2:4; 5:1; 6:9; 10:1; 27; 25:12, 19; 36:1). 이 열 가지 부분들은 2–4장과 37–50장과 같은 긴 이야기들과 5장과 36장과 같은 간결한 족보들 사이에서 교대로 나타난다. 야곱과(25–35장) 더불어 아브라함의 역사와(12–25장) 같은 긴 이야기들을 비교해 보면 예표적인 읽기를 시사해 주는 확실한 유사성들이 나타난다. 특히 아담과 노아를 비교할 때 이런 부분은 더욱 자명한데 노아는 분명히 둘째 아담과 같은 인물이다. 아담처럼 그는 전체 인류의 조상이 되며 아담처럼 그는 죄를 범했다(9:20–27).
중심어들은 창세기를 이어주고 통일성을 부여하는 또 다른 장치가 된다. “복을 주다”와 “복”이라는 단어들은 성경의 다른 책들보다 창세기에서 더 많이 사용된다. 창조 시에 하나님은 새, 물고기, 인간,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 하지만 복을 받는 자는 분명 족장들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이름은 “바라크”(barakh, 복을 주다)의 세 자음 중 두 개를 포함하면서 자신이 복을 실현하는 자임을 암시한다. 창세기의 두 번째 중심어는 3:15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이후에 족장들에게 주어진 약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씨” 혹은 “후손”이다. 세 번째로 중요한 단어는 “땅”으로서 1:1에 처음 나타나고 마찬가지로 족장들을 위한 약속에서 종종 나타난다.
이런 중심단어들은 처음 11장을 이어지는 족장들의 이야기와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들은 12:1–3에 중점적으로 나타난다. “복과 복을 주다”는 다섯 번 나타나고 “땅”은 세 번, 전체 문장은 후손들에게 주시는 약속이(큰 민족을 이루고)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창세기 1–11장은 나라들 사이의 혼란한 국면을 말하는 반면 12:3은 아브라함 안에서 열방이 복을 찾게 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다.


  5. 창세기의 구성요소들

창세기의 메시지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부분들이 전체에 어떤 식으로 기여하는가를 매우 자세하게 조사해야 한다. 창세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질 수 있다.

    1.      첫 번째 해설: 창조기사, 1:1–2:3
    2.      두 번째 해설: 원역사, 2:4–11:26
    3.      핵심: 족장들의 이야기, 11:27–50:26

창조기사는 핵심적 내용을 위한 배경을 제시할 뿐 아니라 주제 또한 미리 암시한다.


1) 창조기사

이 뛰어난 서곡은 6일 간에 걸쳐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증거하고(헬라어로는 “헥사메론”〈Hexameron〉, 즉 “6일 간의 창조”라는 제목이 따른다) 창세신학을 처음으로 설명해준다.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말은 만신전의 신들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창조의 주도권을 행사하시고 명령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암묵적으로는 다신론과 태고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을 배제한다.
두 번째로, 창조기사는 한 분이신 이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말한다. 다른 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신들 간의 치열한 싸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단순히 말씀하셨고 빛이 있으며 마른 땅이 생겨나고 바다에 물고기가 가득차게 되었다. 이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이 결과로 나타나는 분이다. 창조시에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족장들에게 말씀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실 바로 그 하나님이다.
세 번째로, 창조기사에서 유일한 하나님은 전능하실 뿐 아니라 고대 세계의 대부분이 숭배하던 태양, 달, 별들과 같은 천체들은 피조물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전체들과 마른 땅과 같은 피조물에 대한 관심은 이것들이 인간 생존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네 번째로, 창조기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의 창조에서 정점에 이른다. 만물은 이런 관점 속에서 지어졌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1:26)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천상의 주인들과 함께 인류창조를 지켜보시면서 다른 피조물의 모든 관심을 인간에게로 이끌어 가고 있다. 인류는 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번성하도록 명령받은 존재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1:28).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바벨론의 사상과 분명하게 대조된다. 아트라하시스의 서사시에서 인간의 창조는 신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기 위한 부수적인 사건이다. 나중에 신들은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해서 인간의 생육을 억제한다. 반대로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시고 그들의 생육을 권면하신다.
마지막으로, 창조기사는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는 하나님으로 결론을 맺는다. 창조기사의 또다른 독특한 특징이다. 여기에서 암시하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들도 또한 안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괴상한 형태의 고대 이방 축제와 휴일들은 안식일로 대체되어서 하나님은 물론 인간과 가축과 같은 모든 피조물들도 안식해야 한다(출 20:8–11; 신 5:14). 그래서 창조의 목적은 쉼과 평안이지 끝없는 활동이 아니다. 이것은 야곱의 축복에서 재차 확인되는 비전이다(49장).


2) 원역사

두 번째 해설 즉 원역사(2:4–11:26)는 창세기 1장의 이상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죄가 지배하는 현재의 세상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 에덴동산은 조화의 장소여서 자비로운 창조주께서는 물, 식량, 동물, 우애와 같은 인류에게 필요한 모든 필요를 공급하셨다. 첫 번째로, 1:28은 인류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 다음에 2:21–25은 결혼의 원형을 그려내고 있다.
하나님은 완전한 신부를 창조하셔서 아담에게 주고 계시다. 하지만 인류에게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세상에서 아담과 하와는 그들에게 주어진 한 가지 금지명령을 깨뜨리게 되고 우주는 혼란의 상태로 접어든다.
상호적 도움과 우애의 관계는 파괴된다. 인류와 동물 사이의 조화는 죽음에 이를 정도의 투쟁으로 바뀐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3:15). 뱀은 머리가 상하게 되고 인간은 발꿈치만 상하게 되리라는 텍스트는 분명 짐승과 악에 대한 인간의 궁극적 승리를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다. 하지만 텍스트의 초점은 피조물 내에서 벌어지는 계속적인 강포함에 있다. 인간은 단지 동물과 투쟁을 벌이는 데 국한되지 않고 잡초 속에서 먹을 것을 수확하기 위해 애써야 하듯이 식물과의 싸움도 이어나가야 한다(3:18). 그리고 이 모든 일의 결과는 사망이다(3:19).
죽음은 4장에서 재빠르게 다가온다. 가인은 아벨을 살해하고 라멕은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77배의 보복을 약속한다. 동족상잔의 비극적 상황은 족장들의 가정이 어떠할지도 보여준다(25–33장은 야곱과 에서의 모습과 37장에서는 요셉의 상황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죄의 강력한 모습은 “그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는 하나님의 말씀(6:11, 13)에서 나타나듯이 창세기 3–11장에서 지속된다. 일단의 상황으로 인해 하나님은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육체를 멸망시키기 위해 홍수를 보내신다.
재차 이 내용은 창세기가 고대 근동의 신학을 거부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길가메쉬와 아트라하시스(Atrahasis)의 서사시들에서는 너무 많은 인간들이 소음을 지나치게 만들어낸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홍수를 보내는 신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창세기에서는 분노 때문이 아니라 죄가 신적 심판의 원인이다. 길가메쉬에서 묘사되는 신들은 자신들이 행한 재난에 두려워하고 상황을 중지시킬 수 없는 존재로 나타난다. 창세기는 모든 문제가 항상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 아래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을 때 홍수는 물러나기 시작했다(8:1).
홍수는 창조한 모든 것을 멸하는(decreation) 큰 일로 묘사된다. 모든 살아 숨쉬는 생물은 죽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1:2, 9)라고 말씀하시기 전의 상태처럼 물이 지구 전체를 뒤덮었다. 이런 파괴의 행위는 재창조의 행위로 이어진다. 다시 한 번 마른 땅이 나타나고 식물과 나무가 생겨났다. 동물과 노아는 방주를 떠나 땅에 다시 거주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아담과 하와처럼 노아는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8:17; 9:1, 7)는 말씀을 접하게 된다. 노아는 순종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자비로 바꾼 새로운 아담이다(8:21; 참조, 6:5–6).
불행하게도 완전할 정도로 의인이던 노아도 타락하게 되고(9:20–21) 그의 죄는 아들의 행동과 얽히게 된다(가인의 상황을 참조하라). 그래서 세상은 다시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고 바벨탑에 대한 또 다른 광범위한 심판에서 절정에 이른다.


3) 족장들

족장들의 이야기는(50:12) 창세기의 도입부보다 다섯 배는 길다. 이는 분명하게 저자의 관심이 어디에 놓여져 있는가를 보여준다. 저자의 관심은 이스라엘과 12지파의 근원이 어딘가를 추적하는 데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 이상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그는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후손들을 창세기 3–11장에 나타난 인류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12:1–3의 약속들은 “복”과 같은 핵심단어가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약속들은 인류에 대한 죄의 결과를 다루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선언한다.
창세기 12장과 이후 장들의 약속에는 네 가지 요소들이 있다. 첫째로 땅이 약속된다(12:1, 7; 13:14–17). 둘째로 이 땅에 아브라함의 수많은 후손들이 거주하게 될 것이다(12:2; 13:15–16; 17:4–6). 셋째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관계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12:3; 17:4–13). 넷째로 아브라함과 후손들을 통해 지구의 모든 족속들이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12:3; 18:18; 22:18). 약속이 나타난 모든 문장들을 세심하게 읽어보면 그 약속들이 반복되면서 어떻게 발전되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반복을 통해 약속은 더욱 구체화되고 분명해진다. “땅”(12:1)은 “이 땅”(12:7)과 “보이는 땅”(13:15)이 된다. 비슷한 전개가 약속의 다른 요소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약속은 창세기의 메시지 가운데 매우 중심적인 것이어서 데이비드 클라인즈(David Clines, 29)는 모세오경의 주제를 “족장들을 축복하는 약속의 부분적인 성취(이는 부분적인 비성취를 암시한다)”로 올바르게 정의하고 있다.
창세기 12–50장에 걸쳐서 거의 모든 개개의 이야기들은 이런 약속과 연관될 수 있다. 족장들은 점차로 가나안에서 땅의 권리들을 획득한다(21:22–33; 23:1–20; 33:19). 그들은 느리면서도 어렵게 아이들을 낳게 된다(21:1–7; 25:21; 30:1). 하나님의 축복은 어리석게 행동하는 족장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서도 자명하게 나타난다(12:10–20; 20:1–8; 28:1–22; 34:1–35:5). 마지막으로 그들을 통해 몇 명의 이방인들이 축복을 받는다(14:15–24; 20:17–18; 21:22–24; 39:3–23; 47:13–25). 클라인즈가 살펴본 바와 같이 창세기에서 이런 약속의 성취는 부분적이다. 이후의 모세오경의 책들 속에서 좀 더 완성되어가는 성취를 볼 수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궁극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여호수아에 이르러서이다. 이야기 전개는 미래로 열려져 있고 희망과 실망을 오가는 분위기이다.
약속들은 창세기 3–11장에 생생하게 그려진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선언한다. 이 약속들은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다시 확인시켜주기도 한다. 노아와 같이 아브라함 또한 둘째 아담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담에게는 에덴동산이 주어졌다.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을 약속받았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땅의 티끌과(13:16) 하늘의 뭇 별만큼(15:5) 많은 자손들을 주시겠다고 확언하셨다. 에덴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함께 거니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며 완전하라는 말씀을 들었다(3:8; 17:1; 참조, 6:9). 이런 약속들에 대한 순종적이며 충성스런 반응을 통해 약속은 궁극적인 성취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서약으로 바뀌게 된다(22:16–18; 참조, 50:24).
족장들 이야기의 길이와 세부적 내용들은 이스라엘과 12지파의 기원이 창세기의 주된 관심사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약속과 이야기 전개와의 관계를 분석하면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그리고 그 관계를 통한 약속된 땅 및 열방과의 연계성)가 한층 더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스라엘이 그 땅의 소유를 주장하는 것을 정당화시킨다. 하나님은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고 가나안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 땅의 권리를 박탈당했다(19장).
하지만 책의 중반에 가서는 부수적인 주제가 명백하게 나타난다. 가장 긴 두 이야기는 25–33장의 야곱과 에서의 불화, 37–50장의 요셉과 형제들 사이의 불화이다. 동족상잔의 투쟁은 원역사(4:1–16)에 나타나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또한 명백하다. 4장에서 갈등에 대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온 땅이 포악함으로 가득찰 때까지 상황은 악화된다(6:11, 13). 하지만 이후의 족장들의 경우에서 꽤나 다른 결말이 있게 된다. 두 이야기는 감동적인 화해의 모습을 보여준다. 에서는 야곱을 만나기 위해 달려가고 그를 두 팔로 꼭 안아준다. 요셉은 형제들을 용서했음을 선언한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33:4; 50:20–21). 많은 경우에 있어서 아브라함과 이삭은 분쟁 시에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했다(13:8–10; 26:17–33).
이 모든 이야기들 가운데 족장들은 화평을 이루고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기를 원하는 자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의 선의는 가인과 라멕의 회개 없는 굳은 마음과 대조되면서 한층 더 밝게 빛나고 있다. 한편 족장들의 경험은 가정과 국가 사이의 용서와 화해는 실현 가능한 일일 뿐 아니라 바람직한 것임을 시사해준다. 또한 자신의 적들이 가까운 친척이든 다른 인종이든 그들을 용서해주고 화해하도록 읽는 이에게 권고하고 있다.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는 약속이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22:18).


  6. 정경 속의 창세기

히브리어 정경과 기독교 정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가장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위한 어조와 방향을 설정해준다. 창세기는 성경의 기본적인 주제들을 간략하고 명쾌하게 설정해준다. 구약에서 창세기를 직접 인용하고 암시하는 일은 드물지만 주된 생각은 도처에서 나타난다. 신약에서는 창세기의 직접적인 인용이 빈번하며 그 주된 생각들은 율법보다 한층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
구약 정경에서 창세기는 종종 “율법”이라 불리우는 모세오경의 첫 번째 부분을 장식한다. 하지만 “율법”은 히브리어의 원래적 의미를 나타내기에는 너무 좁다. 오히려 “교훈”이라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창세기에 나타나는 이야기들은 심오할 정도로 교훈적이다. 하나님의 본성과 인류의 역할 및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역할 행동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모세오경의 다음 책들도 율법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주어진 배경적 이야기가 제시된다.
특별히 창세기와 그 다음 네 권의 책들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창세기는 출애굽기에서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을 위한 중요한 배경적 지식을 알려준다. 창세기가 없이는 출애굽기에서 신명기에 이르는 구성은 이해하기 매우 어려워진다. 특히 족장들과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들에 대한 빈번한 언급들은 매우 모호해질 것이다. 하지만 모세오경 사이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출애굽기에서 신명기는 모세의 전기처럼 보인다. 출애굽기 2장은 모세의 출생을 말하고 신명기 34장은 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편 중간에 나타나는 모세를 통해 이야기 전개상 매우 중요한 인간의 성품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는 모세의 전기라고 하기에는 그 밖의 내용이 너무 많이 나타난다.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창세기와 나머지 책들 간의 관련성을 발견하게 된다. 족장들에게 주어진 약속들은 모세 사역의 기초가 된다(출 3:6–22). 족장들의 다른 경험들은 모세의 삶 속의 여러 사건들을 위한 전조가 된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애굽으로부터 추방된 일은 그것이 마치 출애굽사건임을 암시하는 어투로 묘사된다. 족장들이 우물가에서 미래의 배우자와 조우하게 되는 일은 모세가 자신의 배우자 될 사람과 만나게 될 사건을 미리 예견하는 듯하다(12:20–13:3; 24:15–28; 29:1–14). 이런 특색들은 창세기를 모세의 삶에 대한 단순한 배경 이상의 의미를 갖게끔 한다.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건국한 족장들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면에 있어서 창세기는 이후의 책들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보충해주는 역할을 한다. 희생제사는 출애굽기에서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꽤나 중요하게 다루어지며 창세기에서 족장들은 인생의 중요한 굽이마다 제사를 드리는 자로서 묘사된다. 더군다나 가인과 아벨, 노아, 이삭의 제사는(12:20–13:3; 24:15–28; 29:1–14) 이야기의 형태를 통해 희생의 중요한 원리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율법의 다른 책들이 율례를 통해 비슷한 가르침을 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창세기 1장은 유일신론을 가르친다. 이후의 율법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 “여호와”만을 예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창세기 2장은 이성과의 관계에 대한 족장들의 접근방식을 이야기한다. 레위기 18장과 20장 그리고 신명기 22장과 같은 내용들은 이런 윤리적 원리들이 논란이 되는 상황 속에서 이런 윤리적 원리가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보여준다.
창세기의 주제와 성격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재차 나타난다. 시편은 창조세계를 기뻐하고(시 104편),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성을 한탄하며(시 106편), 족장의 이야기를 다시 말해준다(예, 시 105편). 같은 주제들이 선지서에서도 나타나며 족장들을 가끔씩 언급한다(사 41:8; 호 12장). 전도서 전체는 타락 이후의 인류의 상태를 생각한 내용이며 죽음을 광범위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본다(3:19).
신약은 창세기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결혼에 대한 관점을 정의할 때 예수님은 창세기 1:27과 2:24을 들어 설명한다(마 19:5). 비슷하게 바울도 죄의 본질을 설명하고 둘째 아담으로서의 기독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창세기 3장을 사용한다(롬 3, 5, 7장). 몇몇 기자들은 아브라함을 믿음과 순종의 모델로 내세운다(롬 4장; 히 11:17–22; 약 2:21–23). 그리고 성경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비전으로 끝낸다. 강, 생명나무, 금, 보석과 같은 가장 눈에 띄는 특징들 모두가 타락 전의 에덴동산을 떠올리게 한다(계 21:1–22:5).


  7. 창세기와 신학

성경의 다른 부분과 초기 기독교 신학에 대한 창세기의 전반적인 영향은 이미 언급했고 이쯤에서 설명을 잠시 중단해야겠다. 창세기의 주제가 성경신학에 기본이 되며 중요하다는 것만 이야기해도 충분할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권세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오직 한 분 주권적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창세기 1장에 명백히 나타나며 성경 전체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모든 신학의 근간이 된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도 창세기의 초반부에 선명하게 나타난다. 인간은 신들에게 음식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고대 세계의 믿음을 뒤집으면서 창세기는 하나님이 인간과 짐승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고 선언한다. 인간의 복지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2장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신적 관심은 구약 전체를 관통하고 신약에서는 성육신에서 최고조에 다다른다.
하지만 고대 신들의 부도덕성과 현대 신들의 허용적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창세기의 하나님은 도덕적 요구에 있어서 단호하다. 인류의 죄성과 폭력성은 세 가지 형태의 심판인 홍수, 바벨에서의 만국의 흩어짐, 소돔의 파괴로 이어진다. 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의 윤리적 성품을 확인케 한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 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죄를 관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인류의 희망이 되면서 동시에 문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악이 궁극적으로 승리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점에서 인류의 소망이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창세기가 가장 의로운 자들도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창세기는 소망 속에서 미래를 내다본다. 족장들에 대한 약속은 마침내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12:3). 창세기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결국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확언한다. 기독교가 나타나기 전부터 이 구절(3:15)은 메시아적인 의미로 정확하게 읽혔다. 현존하는 인류의 상태에 대한 창세기의 단호한 현실인식은 미래의 구속에 대한 확고한 희망을 통해 빛을 발한다.
마지막으로 33장과 50장의 용서와 화해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창세기는 인간사회를 향한 길을 제시한다. 이로써 원수를 용서하고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제자도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는 주님의 명령을 기대하게 된다.


고든 J. 웬함. (2011). 창세기. In 케빈 J. 밴후저 (Ed. &amp; Tran.), 구약의 신학적 해석: 구약 각 권 해석 연구 (초판, p 39쪽 – 54쪽). 기독교문서선교회.]]></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Sun, 04 Jan 2026 08:55:47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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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4 Jan 2026 08:53:35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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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4 Jan 2026 08:51:09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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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뇽 R. 제이콥스(Mignon R. Jacobs)


  1. 개관

미가는 내용의 규모가 학자들이 책의 중요성, 해석에 집중된 연구의 양, 신학적 담화에 있어서 그 위치를 결정하는 요인이 아니라는 한 증거가 된다. 여러 가지 대단위들 안에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 개념적 초점, 이 단위들의 상호연관성을 나타내는 여러 형태의 요소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 한 책의 내용은 해석상의 도전에 직면케 한다.
순차적으로 미가는 12소선지서 가운데 여섯 번째에 위치하며 요나와 나훔 사이에 끼여 있다. 다른 책들처럼(예, 아모스, 호세아) 이 책은 예언적 활동을 당시의 통치자들을 언급함으로써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결부시키는 편집적 요소인 표제로 시작한다(1:1). 미가는 주전 8세기에 활동한 선지자로 제시된다. 한편 내용 중의 일부는 바벨론에 대한 언급과 같은 다른 역사적 배경을 전제한다(4:10; 주전 7세기). 미가는 두 개의 대단위와 그 안의 소단위로 구성된다. I. 1:1–5:15(A. 1:2–16; B. 2:1–5:15); II. 6:1–7:20(A. 6:1–8; B. 6:9–7:20). 미가는 일곱 개로 구성된 장 안에서 사마리아에 대한 심판부터(1:6–7) 남은 자를 위한 보존과 용서에 대한 약속의 선언으로(2:12–13; 7:18–20) 움직여 간다.


  2. 해석의 역사

구약의 여러 내용에서처럼 미가는 여러 신학적 해석을 도출했던 다양한 방법론적 접근의 초점이 되었다. 몇몇 초기 연구에서는 명백한 개념상의 긴장만큼이나 해석자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반추의 질문들과 같은 책의 진위성에 중점을 두었다. 19세기의 스테이드(Stade)가 예를 든 것처럼 책의 현존하는 형태에 나타나는 명백한 불일치는(문체, 역사적 상황, 개념적 통일성) 책의 진위성을 의심하는 근거가 되었다. 스테이드는 적어도 세 개의 구별되는 역사적 상황이 있다고 결론내었다. 미 1–3장(8세기); 4–5장과 7:7–20(6세기); 6:1–7:6(7세기)이다.
20세기와 21세기의 학자들은 내용상의 불일치를 인정하면서도 그 관심은 책의 진위여부보다는 전체적인 일관성에 있다. 구성단위의 편집순서를 살펴본 최초의 학자들 중에 하우프트(Haupt)는 현존하는 책의 순서로 인해 비일관성이 나타난다고 관찰했고 원래의 순서를 회복시킴으로써 일관성이 나타날 것이라고 목격했다. 울프(Wolff), 레스코우(Lescow), 바게나(Wagenaar)를 포함하여 후대의 학자들은 여러 가지 편집상의 누적, 이들의 역사적 상황, 편집의도를 파악함을 통해 책의 구성역사를 분별하려고 시도했다.
메이즈(Mays)는 책의 역사적 상황과 현존하는 형태의 편집의도를 조사하면서 신학적 통일성에 대해 다루었다. 윌리스(Willis)와 핵스트롬(Hagstrom)도 심판(1–3장)과 희망(4–5장)이 번갈아 나타나는 것과 분별가능한 대단위 속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개념들(예, 1–3장; 6–7장에 나오는 죄)과 같은 문예적, 개념적 요소들을 사용함으로써 이에 대한 관심을 표출했다. 제이콥스(Jacobs)는 의미론적 지표들(예, 하타, khatta’ah, “죄”; 페샤, pesha‘, “범죄/허물”), 장르(예, 심판 연설), 책 속에서의 이들의 상호관계에 관한 질문, 구약의 개념적 구조라는 측면에서 거듭 나타나는 개념들을 주목했다.
다비평적 접근도 미가에 대한 방법론적 태도의 일부가 된다. 이 방법들은 책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다양한 비평적 방법을 채택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벤 즈비(Ben Zvi, Micah)는 책의 형태에 대한 관심을 다루었으며 심판이 선언되는 자들(“행악자들”)의 행위를 파악했다. 그는 “독자의 역할”에 대한 문제가 결정적 해석요소인 것으로 보고 관심을 가졌다. 이런 방식으로 독자의 방향성, 억압, 계급투쟁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미가를 사용하는 다른 사람들의 예를 들었다. 2–5장의 구성역사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바게나르는 접근방식의 방법론적 요소가 양식비평과 편집비평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했다. 역사–비평적 분석의 일부로서 앤더슨과 프리드먼은 편집비평뿐 아니라 원문비평을 사용하여 70인역과 마소라사본의 미가를 비교분석하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 모든 접근방식에 있어서 미가가 심판과 소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놓칠 수 없다. 이들은 불의를 시정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종교적 행위는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는 도전과 연관되어 있다.


  3. 내용과 신학적 관심

책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이 외형적 형태의 예배와 회개를 넘어서 정의를 실현할 것을 요구하지만 징벌을 돌리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심판 후에 예루살렘을 회복시킬 것을 약속한다. 죄의 심각성이 더욱 강조되는 것은 제사장이 자신의 역할을 남용하면서 율법을 가르치는 데 있어 타협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사실에서다(참조, 말 1:1–9).


1) 죄와 용서

만연화된 죄의 모습이 관습의 용어와 묘사를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그려지고 있다. 페샤(pesha‘, “범죄/허물,” 1:5; 참조, 6:7), 하타(khatta’ah, “죄”, 1:5; 참조, 3:8; 6:7), 아웬(’awen, “죄”)과 라(ra‘, “악,” 2:1–2; 참조, 3:1–2), 아원(’awon, 남은 자의 “허물”, 7:18)이 그 예들이다. 지도자들과 허물이 있는 다른 자들은 권력을 남용하고(예, 3:1, 5–6) 백성들의 땅과 소유물을 강탈해서 그들을 가난에 빠지게 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2:1–5). 심판은 나라 전체로 확장된다. 미슈파하(mishpakhah, “족속”, 2:3). 하나님은 죄악을 없애고(7:18), 허물을 사유하고(7:18), 죄악을 발로 밟고(7:19),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심으로(7:19) 모든 종류의 죄를 용서하신다(사용되는 용어가 용서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가를 반영한다). 그러한 경우에도 용서는 누구의 죄를 언제 사할 것인가를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참조, 32:1; 36:3; 요일 1:9) 남은 자(셰리스, she’erith; 7:18–20)에게 특별한 것이다.


2) 하나님의 요구

백성들이 만나게 되는 도전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에 대한 이해이다. 첫 번째로 백성들은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고난을 겪지 않는다고 가정한다(3:10–11). 두 번째로 이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요구가 제물을 드리는 것이라고 믿어서 이 요구를 짐으로 바라본다(참조, 암 5:21–25; 사 1:11). 따라서 이들을 희생제물을 드리고 하나님의 마음이 즐겁지는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달래지기를 기대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죄와 제물로 인해 괴로워하신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6:6–8; 참조, 삼상 15:22; 사 1:17; 43:22–24; 호 6:6; 말 1:13). 미가 6장은 하나님이 정의를 행하고, 공동체적 책임을 즐겨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중할 것을 요구하심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6:8). 하나님은 종교적 의식을 거부하지 않으시지만 회개와 정의로 나타나는 순종이 결여된 단순한 외적 행위에 기뻐하시지도 않으신다(사 1:17; 43:24; 렘 6:20; 암 5:21–24; 참조, 딤후 3:1–5).


3) 남은 자와 소망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결단이 바뀔 가능성을 담고 있는 아모스와는 달리 미가에서 심판은 불가피하다. 셰리스(she’erith, “남은 자”)의 정체성은 심판과의 관계만큼이나 많은 관심의 대상이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회복시키고 후일에 새로운 시대를 여실 것임을 약속하신다(4:6–7; 참조, 사 2:2–4). 그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환난에 처하게 한 자들로 구별되는 사람들을 회복시킬 것을 약속하신다(4:6–7). 두 번째로 남은 자는 무죄한 자와 유죄한 자들을 구별하는 데 관심이 없이 형성될 것이다(참조, 사 10:20–22; 11:11). 세 번째로 남은 자는 죄를 용서받고 여호와가 통치하시는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 사용될 것이다. 네 번째로 남은 자는 남왕국인 유다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지칭하는 셰리스 이야코브(she’erith ya‘aqob, “야곱의 남은 자,” 5:7–8[6–7절 MT])로서 지칭되기도 한다(참조, 사 37:31–32). 2:12–13; 4:6–8; 5:9(8절 MT); 7:18–20은 북왕국보다는 이들 그룹을 지칭할 수도 있다. 다섯 번째 남은 자의 특징은 다른 열방들 가운데 일시적이고도 파괴적인 존재로 나타난다는 것이지만(5:7–9[6–8절 MT]) 유다의 모든 남은 자가 하나님의 계획에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참조, 렘 44:12–14).
남은 자의 개념을 살펴보면서 희망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첫 번째로 희망은 파괴의 경험을 통해서 나라가 존재의 모든 양상 속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4:1–5:15[14절 MT]). 두 번째로 회복이 실현되는 종말론적인 관점에 있어서 약속이 주어지는 사람들은 그것을 살아서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참조, 렘 24; 25:9–14).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기다리던 족장들처럼 이스라엘의 믿음의 시험은 현재의 상황이 미래의 비전과 닮은 것이 없을 때 인내하는 데 있다.


  4. 해석적 도전


  1) 응보

하나님은 백성들을 벌하신다. 어떤 이들에게 이 사실은 불의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의 선포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는 죄를 다루시기 위해 심판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희망을 실현하기 위한 사전조건으로서의 심판의 성격과 관계가 있다. 도전 가운데 일부는 하나님이 백성들을 벌하실 뿐 아니라(예, 3:4, 7) 심판 속에는 무죄한 자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예, 2:3–5; 3:12; 호 13:16[14:1 MT]; 참조, 렘 18:19–23). 그 결과 자신들에게 가해진 불의로 인해 황폐하게 된 사람들은 심판의 선포를 통해 더욱 비참해진다. 게다가 죄로 인해 하나님이 나라를 심판하시는 가운데 바벨론과 유다(미 4:10–11, 렘 39장), 앗수르와 유다와 같이(미 5:8–9[7–8절 MT]) 서로를 심판하기 위해 열방을 사용하신다. 이는 예언적, 문예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관점이 현대적 틀 속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상황을 포함한다. 즉, 하나님의 바램, 계획, 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개입하시는 것과(참조, 사 10:12–14; 13장; 43:14; 렘 50장) 해를 주려는 인간의 계획과 동기를 하나님의 계획과 행위와 구별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폭력성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모호하게 주장하는 것은 내재적인 위험이 있다.


2) 하나님의 선택

책 속에서 심판이 예루살렘의 존재에 대한 최종적 선언이 아님을 기뻐할 수 있으면서도 또한 생존한 자, 즉 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하나님은 일단의 생존자들을 보존하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며 남은 자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유죄한 자와 무죄한 자를 구별하시지 않으실 것이다(7:18–20; 참조, 2:12–13; 4:6–8).
한편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회복시키는데 사용될 사람들과(좋은 무화과, 24:2–7) 결국에는 거부될 자들을(나쁜 무화과, 24:8; 29:17; 44:12–14) 구별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을 암시한다. 사람들과 열방들을 택하거나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특권은 선택과 언약적 관계에 있어 중요하다(창 12; 15:2–4; 말 1:2–5).
하지만 하나님은 더 나아가 언약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 안에서 구별을 두셔서 이들 모두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는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참조, 겔 18장; 롬 9:6–9, 11–14장). 이는 그리스도인들 간의 긴장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헌신된 자와 명목상의 신자의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선택은 열방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기로서 사마리아의 황폐와(주전 8세기) 예루살렘 멸망의 틈새로서(주전 6세기) 인식된다. 하나님은 다른 나라를 기꺼이 벌하시면서도 어떤 나라에 대해서든 좀 더 참으시고 인내하신다. 하나님의 선택의 세 번째 국면은 멸망의 도구와 주체로서 사용되는 나라를 선택하시는 데 있다. 그 선택 기준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기뻐하는가와 관련된다.


3) 하나님의 요구

미가의 메시지는 여러 가지 형태의 불의를 조장하면서 종교적 미덕을 자랑하는 공동체에 도전하는 것이다. 미가 시대의 백성들은 단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력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압제한 것으로 고발을 당했다. 그리고 그런 불의는 공동체의 전 영역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가족적 결합은 공동체의 불신에 대항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7:1–7). 모세오경에서처럼 관심은 공동체 안에서 연약한 자들인 과부, 고아,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는 것이다(출 22:21–24; 레 23:22; 신 15장; 사 9:1–7; 11:1–9; 렘 7:5–7; 22:3; 겔 22:7; 말 3:5). 정의를 이룩하는 것은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이 그 힘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지만 교회를 포함한 현대적 환경은 권력의 남용을 용인하는 것 같다. 잘못된 가르침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믿음으로 인정되어 가고 계속적인 불의를 허락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분별하기가 어려워진다(딤후 4:3).


미뇽 R. 제이콥스. (2011). 미가. In 케빈 J. 밴후저 (Ed. &amp; Tran.), 구약의 신학적 해석: 구약 각 권 해석 연구 (초판, p 389쪽 – 396쪽). 기독교문서선교회.]]></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Tue, 23 Dec 2025 00:17:55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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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학개 개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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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학개

폴 R. 하우스(Paul R. House)


구약의 대부분의 짧은 책들에 적용되는 것처럼 학개에 대한 연구는 일반적으로 내용이 긴 책들을 다룬 방식을 따라 이어져왔다. 초기 기독교의 해석은 몇 가지 상징적인 방식으로 내용을 읽는 것에서 나왔다. 여기에는 스룹바벨을 그리스도의 한 모형으로, 회복된 성전을 새 언약의 예언으로서, 스룹바벨의 인장반지를 예수님의 왕적 권세의 상징으로 다루는 것이 포함되었다(Ferreiro). 20세기 초기의 역사–비평적 학자들은 학개의 역사적 참고자료와 그것들이 포로기 이후 시기를 밝혀 주는 빛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들은 책의 진술의 정확성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고 스가랴 1–8장과의 연관성에 주목했다. 또한 편집자 혹은 연대기 기록자가 선지자의 메시지를 기록했고 이를 학개가 활동하던 시기의 짧은 역사에 덧붙였을 가능성을 논의했다. 따라서 학개는 기본적으로 포로 후기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선지자 학개가 행한 사역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다룬 것으로 취급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양식과 편집비평학자들은 이런 발견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고 더 나아가 책의 배경과 편집 수준을 정의하려고 하였다(Beuken; Wolf). 하지만 1980년대까지 몇몇 역사비평학자들은 오랫동안 의견일치를 본 사항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단일 저자에 의한 통일된 작품으로서나(Verhoef; Meyers and Meyers) 적어도 사실상 통일성 있게 편집된 작품으로서(Peterson) 접근할 수 있다는 방식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물론 어떤 전문가들은 이전의 역사비평학자들과 의견을 공유하는 경향을 가졌다(Redditt). 결국 문예적, 정경적 비평학자들은 최종적 형태로서의 책을 분석하는 방법을 찾았다(Childs; House).
전반적인 정경적 상황에서 최종적 형태의 책을 다루는 것은 구약에서 학개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율법과 선지서에서는 이스라엘이 죄로 인해 땅을 상실하는 것과 궁극적으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일부를 그 땅으로 회복시키신다는 것을 강조한다(레 26장; 신 27–28장; 사 4:2–6; 렘 30–33; 겔 36–37장; 호 11:1–9 등). 이런 회복은 때때로 매우 이상적인 용어로 묘사된다(겔 40–48장).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던 혼란스런 시기에 사역을 했으며 각각의 선지자는 나라 전체가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특별히 학개는 성취된 예언, 예언적 말씀에 대한 백성들의 순종, 갱신된 공동체에서 성전의 중요성,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계속적인 축복을 가져오는 다윗 언약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 성취된 예언(1:1)

학개와 스가랴는 동시대 사람들과 가까이 했다. 학개의 메시지는 주전 520년으로 추정할 수 있는 한편 스가랴의 말씀은 주전 520–518년 동안 전달되었다. 따라서 두 선지자는 페르시아가 주전 539년에 최강대국으로서 바벨론 대신 들어선 후 활동한다. 이 사건 자체가 이사야 13:1–14:23, 예레미야 50–51장, 하박국 2:1–20과 같은 구절에서 주어진 약속들이 성취된 것이었다. 두 선지자 모두 고레스의 칙령이 공포되고 첫 번째 귀환이 이뤄진 후에 활동했다. 그의 칙령은 여러 본문에서 약속되고 주전 538–535년에(스1–2장) 일어난 사건처럼 유대인들이 고향땅으로 올 수 있도록 허락했다(사35; 44:28–45:1; 렘 29:1–14).
이런 기념비적인 사건들은 70년간의 이스라엘 포로생활이(렘 29:1–14) 청산되고 이제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다시 거주하고, 갱신된 언약 가운데서 여호와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새 시대로 접어든 증거로 마땅히 간주될 수 있다(신 28:1–4). 예언은 학개가 생존하던 시기에 실현되고 있었고 문제는 성취의 과정이 실제상의 경험에서는 어떻게 보였는가 하는 것이었다.


  2. 예언적 말씀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의 축복(1:2–15)

학개의 백성들은 초기 선지자의 선포 때문에 큰 축복을 기대할 수도 있었지만(1:9) 여호와의 심판을 여전히 경험하고 있었다(1:6). 학개는 이런 상황이 온 이유가 그들이 성전을 완성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 땅으로 귀환케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데 있다고 선포한다(1:2–11). 여호와가 영광을 받지 못하므로 그들은 땅에서의 유익을 받지 못하고 있다(1:8). 자신의 땅에 있기는 하지만 징벌을 당하는 백성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학개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일어나서 성전을 짓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이름으로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따라서 여호와는 그들의 마음과 육체를 새롭게 하여 움직이고, 동기를 주고 능력을 주신다(1:13–14). 이들의 반응은 초기의 선지자들이 인내해야 했던 귀기울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 세대를 분리시키는 것이다(왕하 17장). 그 땅으로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고(1:1) 자연을 통제하시는(1:2–11) 그 하나님이 성전이 상징하는 영광을 누리신다는 것을 그들은 인식한다.
성전재건을 요구하면서 학개는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열왕기상·하, 이사야, 시편에서 발견되는 중앙성소에 대한 강조에 동의한다. 성전은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의미하며(1:12–14; 출 32–34; 왕상 8장) 이스라엘의 헌신과 복종을 보여주는 것이다(1:2–6; 출 35–40; 왕상 5–7장). 학개는 또한 신명기 28:64–68과 30:1–10; 이사야 60–62장; 예레미야 30–33장; 에스겔 40–48장에서 보여주는 미래에 대한 일치된 관점을 가진다. 학개가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는 이유는 여호와가 역사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성전 건축을 이런 미래와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개는 분명히 주전 520년의 사건 속에 자신의 믿음을 정초시키지만 동시에 여호와께서 미래에 하실 큰 일 또한 기대하고 있다.


  3. 성전과 갱신된 공동체(2:1–19)

건축이 진행되면서 현재 지어지는 성전이 예를 들자면 에스겔이 환상에서 본 성전의 아름다움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겔40–48장). 따라서 선지자는 세 가지 기본적인 약속을 가지고 백성들을 권면한다. 첫 번째로 여호와는 출애굽 때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방식으로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다(2:4–5). 여호와는 시내산 언약 혹은 시내산 언약의 대상을 잊으신 적이 없다. 두 번째로 여호와의 영이 그들 가운데 있음으로 어떤 두려움도 제거하실 것이다(2:5). 세 번째로 땅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이 모든 나라의 보배로 성전을 채우실 것이다(2:6–8). 하나님의 임재와 온 세상에 대한 주권은 성전의 처음 영광보다 성전의 나중 영광을 더 크게 하실 것이다(2:9). 그때에 성전을 통해서 여호와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탁월함이 열방 가운데서 두드러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영광은 이스라엘이 정결한 백성이 되지 않으면 나타날 수 없다. 성전건축이 시작되기 전에 이스라엘이 행한 모든 일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부정했다(2:10–14).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가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서 축복하실 것이다. 그들의 모든 필요는 충족될 것이고(2:15–19) 이는 레위기 26:3–13과 신명기 28:1–14에 언급된 복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호와는 그들의 회개를 반기실 것이다.


  4. 다윗의 언약과 새로운 축복(2:20–23)

이렇게 언급된 여호와의 백성들, 성전, 임재를 고려한다면 선지자가 다윗 언약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으로 결론 내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결국 완전한 다윗 혈통의 통치자가 출현하는 것은 갱신에 대한 여러 메시지중의 일부분에 속한다(사 9:2–7; 11:1–9; 렘 23:1–8; 겔 34:20–24 등). 학개는 다윗의 후손이자 이스라엘의 현 지도자인 스룹바벨이 여호와의 손의 “인장”과 같다고 역설한다(2:23). 학개는 스룹바벨이 오실 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는 주님이 다윗 언약을 버리지 않았다는 상징이다(삼하 7장). 다윗의 계보는 끝나지 않았고 따라서 이스라엘에게는 장기적인 희망이 있다. 이 본문은 열왕기하 25:27–30과 같은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포로로 잡힌 다윗의 후손인 여호야긴의 명예가 회복된다. 여호야긴은 약속된 다윗혈통의 통치자는 아니지만 그가 존재함은 다윗의 약속이 지속되게 한다.


  5. 결론

학개의 신학적 통찰력은 과거, 현재, 미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그것은 언약의 약속과 이전의 성경기자의 종말론적 비전에 뿌리 내리고 있다. 또한 언약의 약속과 언약적 순종을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축복에 연결시키고 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지금 순종하는 여호와의 종들과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학개는 성경 전체의 특징을 이루는 삶, 약속, 종말의 “지금”과 “아직”이라는 측면들을 강조한다. 따라서 예언적 약속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접근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둘 다 일대일의 예언 성취라는 단순한 구조보다 더 미묘하다.


폴 R. 하우스. (2011). 학개. In 케빈 J. 밴후저 (Ed. &amp; Tran.), 구약의 신학적 해석: 구약 각 권 해석 연구 (초판, pp 419–424). 기독교문서선교회.]]></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Tue, 18 Nov 2025 07:43:58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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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임직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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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3 Nov 2025 07:49:24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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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손영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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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Mon, 03 Nov 2025 07:41:23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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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Mon, 03 Nov 2025 07:39:47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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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에스라 느헤미야서 이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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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Mon, 03 Nov 2025 07:37:47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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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느헤미야 개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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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느헤미야

존 J. 빔슨(John J. Bimson)


느헤미야는 원래 에스라의 연장선에 있던 책이었다. 이를 통해 주제적으로 이야기적으로 두 책이 연결이 되었다(“Ezra” 12장을 살펴보라). 느헤미야 1:1이 그 전에 거의 언급이 되지 않았던 느헤미야에 의한 1인칭 내러티브로 시작된다는 사실이 두 책을 분리시키기 위한 정당한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스 2:2에 나오는 느헤미야는 다른 인물이다).
에스라 7–10장의 마지막 사건들과 느헤미야 1:1의 12년 간의 간격은 이 책들을 분리시키기 위한 충분한 보증이 되지 못한다. 훨씬 긴 시간 간격이 에스라 7–10장과 1–6장 사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두 책으로 분리하는 것은 책 전체의 신학적 해석을 방해하는 데 더 많은 기여를 한다.


  1. 해석의 역사

여러 전비평적 기독교 해석은 겸손, 페르시아 궁정에서 제공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고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기여, 실제적인 선견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존하는 능력과 같은 느헤미야의 개인적 자질에 초점을 맞춘다.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인해 그는 핍박의 시기에 대비하는 가운데 어떻게 교회를 부흥시키는가에 대한 한 예로서 비춰지기도 한다.
최근에는 신학적 해석이 역사–비평적 문제들 밑으로 잠수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차일드가 말하듯이 많은 학자들이 “적절한 해석은 사건의 정확한 역사적 순서를 구성하는 데 달려있다는 가정”을 통해 에스라–느헤미야에 접근하고 있다(630). 이런 목적을 위해서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연대기적 관계에 대한 수많은 토의가 진행되어 왔다. 많은 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전통적인 순서에 있어서 어려움을 경험했고 본문을 그에 따라 수정하고 재구성했다. 사실 그와 같은 과감한 해결책을 불필요하게 경험된 문제에 대한 다른 식의 접근이 가능하다(Kidner 146–58; Williamson, Ezra, 55–69).
에스라–느헤미야에서 사법적으로 효력을 갖는 율법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학자들 간에 많은 논쟁이 있었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기 때문에(스 7:6) 그가 가르침에 착수한 법률이 에스라 6:18과 느헤미야 8:1, 14; 10:29(내용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에 언급된 “모세의 책”에 담겨 있었다고 전제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전통적 관점에서 이 책은 모세오경에 속한 것이지만 몇몇 자료비평학자들은 완전한 모세오경이 주전 5세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의심해 왔다. 모세오경이 그만큼 오래된 것임을 받아들인다 해도 질문은 남아 있다. 에스라–느헤미야에서 발효된 율법 중의 일부는 모세오경과 정확하게 일치되지 않는 것 같고 이때문에 후트만(Houtman)과 같은 학자는 현존하지 않는 다른 자료에 기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결론은 정경의 다른 부분과 에스라–느헤미야가 연관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암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세오경의 율법을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적용하는 데 있어 분명한 진보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가능하다(Williamson, Ezra, 90–98). 이런 견해가 받아들여진다면 모세오경이 포로기 후 공동체가 그 책의 권위를 인정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에스라–느헤미야를 문예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읽으려는 신선한 시도는 에스케나지(Eskanazi)에게서 비롯되었다. 에스케나지는 느헤미야가 3부작의 이야기 구조를 가진 것으로 파악한다. “잠재성”(스 1:1–4, 목적이 정의된다), “성공”(8:1–13:31, 목적이 실현된다). 주요주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권위를 가지는 문서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가”로서 파악된다. 에스케나지는 “하나님의 전”이라는 개념을 공동체를 포함하는 것으로까지 확장시킨다(175–76). 텍스트를 암시적이지만 논쟁적으로 읽는 방식이다.
느헤미야를 학제간(Interdisciplinary)으로 읽는 최근의 방식은(Tollefson과 Williamson) 책을 전체로서 이해하는데도 기여를 했다. 이들은 1950년대에 인류학자 월라스가 공식화한 문화적 재활이라는 모델을 적용한다. 이를 통해서 느헤미야의 연속적인 사건들이 이 모델에서 기술하는 여섯 개의 단계에 밀접하게 결부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책의 여러 부분들이 어떻게 일치가 되는가를 직전의 시도보다 더 좋은 설명을 제공하고 현재의 텍스트가 심각한 위치의 변화를 겪었다는 의심이 일어날 근거를 제거해준다.
예를 들어 느헤미야 8–10장의 연속적 사건들은 월라스의 모델인 “문화적 변혁 단계”와 잘 부합하고 여기에서 예견하는 지점에서 정확하게 일어난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내용을 재배치할 이유가 없게 된다. 한편 이 학자들은 에스라–느헤미야를 편집한 사람들이 모든 사건을 발생한 대로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편집자가 특정한 사건들의 연대기적 순서를 변경했을 수는 있지만 그 전달방식은 고립시켜 임의로 사용한 자료보다 전체로서의 사회적 흐름을 더 충실하게 그려낼 수 있다”(Tollefson과 Williamson 65).
오뎃(Oded Lipschits)의 최근의 연구는 느헤미야 11장에 집중되어 있지만 전체로서의 책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 열매를 맺고 있다. 오뎃은 느헤미야 11장이 예루살렘의 이전 영광이 유토피아적 미래의 전조가 되는, 에스라–느헤미야의 다른 내용을 암시하는 것으로 충만한 최고조의 단계로 본다.


  2. 정경적 상황

느헤미야는 에스라에서 시작된 내러티브를 포함할 뿐 아니라 구약의 역사서에 포함된 가장 최근의 사건들도 담고 있다(에스더에 나오는 아하수에로왕이 아닥사스다1세가 아닌 스 4:6에 나오는 아하수에로왕과 동일인물임을 가정한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책들을 배열할 때 에스라–느헤미야 다음에 역대기를 위치시키며 정경의 결론에 다다른다. 이는 주제적으로(저자의 문제는 제쳐놓는다 해도) 에스라–느헤미야가 역대기에 이어지는 책이라는 관점으로 볼 때 놀라운 것이다. 역대기가 아담에서 포로귀환에 이르기까지 구약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에 마지막에 놓였을 수도 있다.
느헤미야는 구약의 역사적 내러티브에 대한 이중적인 결론을 제공한다. 예루살렘에 성벽이 재건되고 도시의 인구가 증가하며 종교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기 위한 여러 개혁조치들이 취해진다. 이와 같은 성공적인 사건들의 관점에서 8–12장까지는 승리의 어조로 기록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다른 한편으론 마지막 장은 우리에게 가장 엄숙한 봉헌행위 직후에도 남용과 실패가 일어나기가 얼마나 쉬운가를 기억하게 해준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조상에게 약속된 땅으로 돌아왔지만 그 땅에서 그들은 여전히 “종들”이다. 비옥한 땅의 소출을 누리기보다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주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이방왕들이 이 땅의 많은 소산을 얻고 그들이 우리의 몸과 가축을 임의로 관할하오니 우리의 곤란이 심하오며”라는 고백에 이른다(9:36–37; 참조, 스 9:8–9).
간단히 말해서 바벨론 포로의 특징을 보여주는 많은 요소들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보여주고 있다(백성들의 죄, 땅으로부터의 소외, 이방지배자들의 억압). 현재 진행되는 “포로”상태에 대한 의식은 중간기 텍스트에서 나타나고(예, 바룩 2:7–10; 마카비서 1:10–2:18) 예수님의 메시지의 많은 측면들이 이런 배경 가운데 가장 잘 이해된다(Wright 268–72; Evans). 이런 시각에서 느헤미야는 다른 예언적 책만큼이나 확실하게 신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내다보게 한다.


  3. 신학

느헤미야의 신학적 메시지를 분별하기 위해서 이 책을 단순히 문예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뿐 아니라 에스라의 연장선에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윌리암슨이 에스라–느헤미야의 “전반적인 신학적 형태”를 분별한 것이(Ezra) 도움이 된다. 그는 에스라–느헤미야를 다섯 개의 “장들”로 나누고 이중 마지막 세 장이 느헤미야에 해당하는 것으로 분류한다.
에스라 1–6장은 성전건축이 반대에 직면한 것에 초점을 맞춘다. 7–10장은 회복계획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에 따라 공동체를 정의하는 두 번째 단계로 이동한다(7:26). 느헤미야 1–7장은 페르시아의 다른 왕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서(참조, 스 1:1; 7:27) 예루살렘 성벽 중건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다시 반대에 부딪히는 상황으로 옮겨가며 초기의 과정들을 공명한다. 이어서 느헤미야 8–12장은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함께 이룬 업적을 다함께 기념하면서 최고조에 이르는데 윌리암슨이 칭하기를 초기에 이룬 성과가 “일시적으로 중단된 최고조 단계”의 상황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하지만 느헤미야 13장은 이후에 일어나는 방해공작을 이야기하면서 “지금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이라는 기록과 함께 텍스트를 종결한다. 윌리암슨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전체로서의 책의 내러티브 구조는 미래의 염원을 위한 모델로서 과거의 성취를 가리키고 있다”(“Nehemiah,” 981).
에스라–느헤미야의 신학적 관점은 연대기적 관심이 이차적일 수 밖에 없는가를 설명한다. 이는 에스라 1–6장의 자료를 연대기적으로 배열하는 것보다 주제에 대한 것을 편집자가 선호하고 에스라 7:1의 “이 일 후에”라는 말씀과 함께 거의 70년을 지나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자명하게 나타난다. 에스라 10장의 사건과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소식을 받았을 때 12년이 침묵 가운데 흘러간다.
느헤미야 1–12장의 사건들은 1년도 안되는 시기에 발생하고 느헤미야가 총독으로서 첫 번째 임기중 남은 11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13:6). “며칠 후”라는 모호한 표현외에 13:6–31에 나타나는 두 번째 임기중 일어난 사건에 대한 어떤 연대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역사가들에게 좌절스러운 것이지만 신학적 읽기를 위한 나름의 중요성을 갖는다. “역사적으로 시간의 경계를 갖는 사건들은 구속역사로서 적절히 여겨질 수 있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과정의 한 단계로서 볼 수 있기 위해서 연대기적인 정박지에서 이탈하게 된다”(Williamson, Ezra, 81).


존 J. 빔슨. (2011). 느헤미야. In 케빈 J. 밴후저 (Ed. &amp; Tran.), 구약의 신학적 해석: 구약 각 권 해석 연구 (초판, pp 195–200). 기독교문서선교회.]]></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Mon, 03 Nov 2025 07:35:56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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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에스라 개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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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에스라서   개관

에스라

존 J. 빔슨(John J. Bimson)


처음 보기에도 에스라는 신학적 해석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평탄치 않은 책이다. 책의 반 이상이 주전 538년의 고레스 칙령으로부터 주전 516년의 성전재건이 완성되기까지의 1차 포로귀환자의 상황을 다룬다. 에스라는 거의 60년의 시간이 흐른 7장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중간시기의 사건들은 4:6–23에 나오는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그려진다.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돌아오는 에스라의 귀환이 7–10장의 중심내용이 되며 1년 동안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다(458/457). 기독교의 해석자들에게 특히 걸림돌이 되는 내용은 타협이 없는 유대인들의 정체성으로 혈통적 순수함과 재건된 성전에서의 예배에 대한 관심이다.


  1. 해석의 역사

에스라는 원래 느헤미야를 포함하는 장문의 내용 가운데 첫 번째 부분이었다(정경으로 분류된 가장 초기의 목록에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초대교회 때 두 권의 책으로 분리되었는데 3세기에 이 증거가 나타난다. 두 권의 책으로 분리되는 일은 1448년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현재의 배치에 있어서 에스라–느헤미야의 기본적 통일성을 모호하게 하는 일은 허락되지 않으며 이 글도 느헤미야와 관련해서 읽어야 한다.
전비평적 기독교 해석자들은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모형적인 관점으로 읽거나(예, 이방인들과의 결혼으로 인한 위기가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 자녀 사이의 구별을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 우열을 가늠해야 하는 두 사람의 개인적 경건을 실례로 들었다. 어떤 주석가들은 느헤미야가 “주님이 보내신 위로자”라는 의미인 반면에 에스라는 “도움을 주는 자”를 뜻한다는 제롬의 해석을 취하여 두 책을 곤경의 때에 도움과 위로를 주는 작품으로 취급했다. 영국 국교의 어느 주교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합본을 교회와 국가의 연합을 예상하고 합법화해주는 것으로 보았고 다른 주교는 이들을 종교의 수동적이며 적극적인 미덕의 예로서 보기를 선호했다.
에스라를 유대주의의 아버지로 간주하는 랍비전통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19세기와 20세기 초기의 기독교 비평학계는 일반적으로 에스라라는 인물과 에스라서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포로후기의 유대주의는 초기의 예언적 신앙보다 열등한 것으로 널리 생각되었고 이런 관점이 자연스럽게 에스라–느헤미야를 평가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역대기자의 허구적 창작물로 보는 토리(Torrey)의 관점은 이런 경향을 극단적으로 반영한다. 다른 학자들은 에스라의 역할을 단순히 과소평가하거나 그를 실패자로 결론지었다. 에스라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관점을 부활시키려는 시도가 있기는 하지만 최근의 학계는 좀 더 긍정적인 평가로 이행하고 있다.
바벨론 탈무드(B. Bat. 15a)에 따르면 에스라는 에스라–느헤미야와 역대기의 저자이며 소수의 현대 학자들이 이런 관점을 옹호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역대기의 무명의 저자가 에스라–느헤미야의 최종 형태를 가져왔다고 보고 있다(예, Clines; Blenkinsopp). 역대기와 에스라–느헤미야에 대한 통일된 신학적 자세가 취해지는 한 이런 관점이 신학적 해석에 영향을 끼쳐왔다.
확실히 이 두 작품이 여러 가지 공통적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다(Blenkinsopp 53에 요약되어 있다). 하지만 1970년 이후로 수많은 학자들이 에스라–느헤미야의 구별되는 사고와 강조점들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있고 동일 저작 이론에 강하게 도전하고 있다(Williamson, Israel 5–70). 에스라–느헤미야가 독립된 저자를 갖는다는 의견이 최근에 많은 지지를 받고 있지만 문제는 복잡하며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다.


  2. 에스라의 메시지

에스라–느헤미야 가운데 다양한 자료가 있다는 증거가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이 작품의 해석은 역사–비평적 문제들 속에 갇히는 경향이 있었다(Childs 626–30). 널리 알려진 예외는 에스케나지(Eskenazi)가 에스라–느헤미야를 문예적으로 통일된 작품으로 읽으려고 시도한 것과 윌리암슨이 “작품 전반의 신학적 형태”를 분석한 것(“느헤미야”)이다(“느헤미야”의 13장을 살펴보라). 이와 같은 연구들은 최종적 문학 형태의 메시지에 중점을 둠으로써 신학적 해석을 손쉽게 한다. 이들은 에스라를 문예적으로 완성된 형태로서뿐 아니라 더 큰 작품의 첫 번째 부분으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품에 나타나는 핵심적인 신학적 문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지속되고 있냐는 것이다. 포로귀환자들이 포로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을 본다면 초기의 “이스라엘”이 존재한다고 여전히 말할 수 있는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이 주신 정체성과 목적은 그대로 있었는가?
에스라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런 문제에 “네”라고 대답한다. 도입 구절은 하나님의 목적이 포로기 전부터 수립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성전이 원래의 부지에 지어졌음이 재차 강조된다(2:68; 3:3; 5:15; 6:7). 따라서 솔로몬의 성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닌 이의 재건축으로 볼 수 있었다(6:3–4; 왕상 6:2, 36). 느부갓네살이 성전에서 약탈한 기명들이 되돌려졌다(1:7–11). “모세의 율법서”에 따라 성전 일꾼들이 임명되었다(6:18). 에스라 자신이 포로 전 세대의 제사장 후손이다(참조, 7:1; 대상 6:14). 2장과 8장의 족보는 연속성을 확증하는 역할도 한다. 포로귀환자들은 12부족을 대표하며(6:17; 8:35)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라 불릴 수 있었다(6:16; 21).
하나님의 목적이 연속성도 모형론에 의해서 확증된다(Williamson, Ezra 84–86). 에스라는 이사야 40–55장과 함께 포로에서 귀환하는 것이 제2의 출애굽이라는 관점을 공유한다. 따라서 1:11b는 출애굽기 3:17; 33:1 등에서 나타나는 언어를 반영하고 옛날에 바벨론에서 하나님이 이끌어내신 사건을 회상하게도 해준다(참조, 창 15:7). 이런 출애굽의 모형은 1차 귀환자에 한정되지 않는다. 에스라 자신의 “바벨론으로부터의 여행”이 첫째 달 초하루에 시작되었다(참조, 7:9). 하지만 출애굽기 12:2–6의 내용을 공명시키려는 이유 때문에 에스라가 선택한 날인 첫째 달 12일이 되기까지(8:31) 이들은 아하와강을 실제로는 떠나지 않았다.
모형론의 사용은 전도유망하지 않은 시작과 함께 자신의 백성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노예상태에서 구해내신 그 하나님이 비슷한 방식으로 행하신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3. 정경적 상황

과거와의 연속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에스라–느헤미야는 앞을 내다보기보다는 이전을 돌아보고 페르시아 제국내에서의 유대 공동체의 지위를 감수하는 정경적 흐름의 맨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레미야의 예언(1:1), 학개, 스가랴의 예언(5:1; 6:14)에 대한 언급은 성취의 시기가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불만족함이 강하게 흐르고 부분적으로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의식을 놓치는 것이다. 페르시아 왕들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이다. 이들이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한 대리인들로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그들의 지배하에 백성들이 경험하는 것은 종살이일 뿐이다(9:8–9). 에스라 6:22에서 페르시아왕은 “앗수르왕”으로 불리는데 이는 오류인 것 같지 않다. 아마도 “제국들 사이에서 선택할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지”일 것이다(McConville 38).
회복된 이스라엘은 초기의 이스라엘의 죄를 되풀이하고(9:10–14) 에스라10장에서 이방부인들과 이혼하겠다고 서원한 사람들의 목록은 부정과 수치의 순환이 그로서 종결된다는 어떤 확신도 제공하지 않는다. 실제로 느헤미야의 결론에서 언약에 대한 재헌신을 다짐한 후에 더 많은 죄에 빠지는 경우를 보여주고 있다. 부분적으로만 성취된다는 기대를 여러 차례 보여주는 것은 포로 후 공동체가 하나님의 목적이 펼쳐지는 한 단계일 뿐임을 기억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배타성을 생각할 때 이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족보를 통해 수립되고 이방인과의 결혼을 취소함을 통해 보호되는 혈통적 순수함은 편협한 국수주의와 배타적인 구원론처럼 들리지만 역사적 정경적 상황 가운데 놓여져야 한다. 역사적으로 연속성과 적법성에 대한 관심은 특정한 상황에 대한 반동으로 볼 수 있다. 정경적으로는 에스라–느헤미야의 방향은 구약의 다른 내러티브와(예, 창 41:50–52; 수 6:25; 룻 4:13–17) 여러 예언적 텍스트에(예, 사 49:6; 56:3; 슥 8:20–23) 나타나는 이방인들에 대한 좀더 열려진 태도를 통해 균형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구약의 이스라엘은 선택과 열방에 대한 제사장적 역할의 긴장 가운데 살았다(창 12:2–20과 출 19:5–6에 요약되어 있다). 때로 이런 양극성의 한 측면이 전면에 나타나거나 다른 측면이 나타나기도 한다.


  4. 신학

역사적인 관점에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회복은 점차적인 것이었고 방해와 반전으로 인해 난항을 겪었으며 어떤 일관적인 계획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에스라–느헤미야의 신학적 관점은 겉으로는 단속적으로 보이는 사건 속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지도하시는 손길을 보는 자리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는 연대기적 순서에 대한 무시와 수년 간의 공백과 어떤 경우에는 십수 년의 세월이 침묵 속에 지나쳐버리는 사실을 설명해준다(“Nehemiah” 13장을 살펴보라).
국가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추척하려는 저자의 바램은 이런 관점과 관련이 있다. 세속 역사가라면 유대인 포로들의 본국송환과 성전재건을 피지배국가의 종교생활에 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정책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에스라–느헤미야는 페르시아왕들의 중요한 역할들을 인정하고 있지만(1:1–4; 6:1–12)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아닥사스다의 마음에 성전을 아름답게 하려는 뜻을 일으키신 것은 여호와이셨음을 독자가 깨닫기를 원하고 있다(1:1; 7:27).
에스라 6:14는 특히나 뚜렷하다. 저자는 성전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완공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아닥사스다는 실제로 14–15절에 언급된 시기 이후에 통치하던 왕이지만 페르시아의 세 왕 모두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었기 때문에 포함되어 있다. 믿음의 눈은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 통치자의 행위를 예리하게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존 J. 빔슨. (2011). 에스라. In 케빈 J. 밴후저 (Ed. &amp; Tran.), 구약의 신학적 해석: 구약 각 권 해석 연구 (초판, pp 187–192). 기독교문서선교회.]]></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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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3 Nov 2025 07:34:53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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