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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ydney Good People  Presbyterian Church</title>
		<link>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link>
		<description>Loving God Loving People</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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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고린도전서 개관]]></title>
			<link><![CDATA[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content_redirect=364]]></link>
			<description><![CDATA[고린도전서

데이비드 E. 갈런드(David E. Garland)


고린도전서 해석에 대한 인상적인 역사는 고린도전서가 독신 생활(7:1–40), 주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의 방식(11:23–26), 부활의 본질(15:1–58)에 관하여 논쟁하며 그런한 논쟁에 대한 고린도전서의 공헌을 근본적으로 파헤치는 것이었다. 바울이 교회에서 발생한 실제적 문제들을 안정시키기에 전념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에, 최근에 많은 학자들은 서신들이 발전된 교리가 부족하고 응용된 신학만을 포함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바울은 개별적 지도자들의 중요함, 인간 성욕의 본질, 영적 은사들의 본질과 부활-이러한 것들은 지나친 행동으로 이끌어 간 문제들이다-의 본질에 관하여 혼란을 야기하는 고린도교인들의 겉치레 신앙을 대항하는 것으로 보인다.
20세기에 이러한 신념은 도덕률 폐기론 영지주의와 동일시되었다. 고린도전서는 몸과 피를 가진 부활을 부정하는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하여 영적인 몸에 관한 바울의 진술을 붙들었던 발렌티누스(Valentinus) 전통에서 후기 영지주의를 선호하지만, 다수는 영지주의가 고린도에서 대적자들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회의적이다. 다른 학자들은 필로의 것과 유사한 소피아(sophia)와 그노시스(gōnsis)에 초점을 맞추는 헬라적 유대주의 종교성에 대한 문제로 추정한다. 더욱 최근에 일부 학자들은 문제들이 “실현된 종말론”에 기원한다고 주장한다. 고린도교인들은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고 하는 바울의 진술을 추정해 보건대 문자적으로 이해한 것 같고, 마치 주의 날이 이른 것처럼 그들이 이미 도래한 왕국에 살고 있다는 과열되고 영적인 망상을 발전시켰던 것이다(고전 4:8; 고후 2:2). 영광의 신학은 십자가를 경시하도록 그들에게 또한 영향을 미쳤다.
또 다른 최근의 연구는 고린도에서 문제들은 허울만 그럴듯한 신학적 믿음에서 발생하였다기보다는 그들의 문화적 배경의 영향으로부터 분출하였다는 주장이다. 바울의 목적은 그들의 신학을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신학적으로 사고하도록 하는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다신론의 다원론적 문화에 적합하게 반응하도록 하였다. 칼 바르트는 주장한다. “전체 서신의 담화는 단일한 문제로부터 진행하여” 죽은 자의 부활인 “이 지점까지 되돌아간다”(113).
암살되기 직전인 주전 44년에 율리오 시이저(Julius Caesar)는 로마식민지로서 고린도를 재건하였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문화, 종교, 가치의 위엄을 육성하기 위하여 식민지들을 만들었다. 한 세기 후에 바울이 그리스도의 위대한 주권을 선포하기 위해 고린도에 왔을 때, 그는 로마와 로마의 동쪽 지역 사이 중요한 연결 통로이며 상업적으로 풍부한 도시를 발견했다. 고린도전서는 공적(public) 지위를 얻고, 자신의 명예를 선전하며 자신의 권세를 굳게 지키는 것에 몰두하는 로마 문화적 가치에 물이 든 상업적인 사회적 배경으로 읽어야 한다. 부족한 명예를 위한 쟁탈은 부족한 부를 위한 쟁탈만큼이나 격렬하였다. 십자가의 메시지에 대한 대조로 지배적 문화의 가치는 교회 안으로 침투했으며 교회의 교제와 교회의 기독교 증거를 파괴하였고, 일부 교인들이 기독교 규범을 세속적 규범과 헛되게 균형 맞추기를 추구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세속적 가치는 사랑, 자기희생, 모든 회원들의 동등한 가치에 기초한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바울의 시도에 혼란만 가져다 주었다. 바울은 올바른 신학에 기초해 조심스럽게 정련한 윤리적 권면들로 그들의 잘못된 행동들을 교정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다루는 문제들은 베드로, 아볼로, 바울과 정의하기 힘든 그리스도파(1:12) 주변으로 소용돌이 치는, 예상할 수 있는 신학적 논쟁들이라고 추정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라이벌 관계는 지식, 지혜, 신령한 은사와 영지주의 세계관의 화려한 과시에 매력을 느끼는 고린도교인들과 결합하였고, 이런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인 교제를 분리시키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최근의 경향은 고린도에서 문제들을 인물중심적 술책과 회원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것으로 조사하고 있다. 공동체 내에서 불협화음의 파벌 싸움은 신학적 해석의 고상한 핵심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정교회들의 주인 역할을 한 지도적 인물들의 경쟁의 원인이 되었다.
세속 윤리의 영향과 고린도인들이 십자가의 지혜에 담긴 완전한 함축을 붙들기에 실패한 것은 그들의 경쟁적 당파 정신(1:10–4:21), 세상 법정에 다른 이들에 대한 그들의 고소(6:1–11), 성적 음란과 그들의 위험한 접촉(5:1–13; 6:12–20), 우상과의 접촉(8:1–11:1), 주의 만찬에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의 굴욕(11:17–34), 특별한 영적 은사에 대한 그들의 자랑(12:1–14:40)으로 이끌었다. 헬라 세계관은 죽음 후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이생에서 믿도록 하였다(15:1–58). 그들은 육신이며 쇠하는 이 땅 위의 육신이 어떻게 영적이며 쇠하지 아니하는 천상의 영역에 적합하게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바울의 편지는 고린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에 관한 구두 보고에 대한 그의 실망적 반응(1:11; 5:1; 11:18; 참조, 16:17–18)과 그에게 편지로 물었던 고린도교인들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7:1을 보라)에 기원을 가진다. 문제들은 매일의 삶의 복잡함-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사는 남자(5:1–13), 동료 그리스도인에 대항한 기소(6:1–11), 매춘(6:12–20), 이혼과 결혼(7:1–40), 우상의 제물(8:1–11:1), 공적 예배에서 머리에 쓰는 문제(11:2–16), 주의 만찬에서 분열(11:17–34), 예배에서 방언의 사용(12:1–14:40)과 같은-에서부터 기인한다. 바울은 구두 보고에 대한 그의 반응과 고린도교인들의 편지에 대한 그의 대답을 교차적으로 사용한다.

  A. 구두 보고(Oral reports, 1:10–4:17/4:18–6:20)
  B. 고린도교인들의 편지(Corinthian letter, 7:1–40/8:1–11:1)
  A. 구두 보고(Oral reports, 11:2–34)
  B. 고린도교인들의 편지(Corinthian letter, 12:1–14:40)
  A. 구두 보고(Oral reports, 15:1–58)
  B. 고린도교인들의 편지(Corinthian letter, 16:1–12)

각각의 경우에 바울은 그들이 행동하고 있는 것을 올바르게 지도하기 위하여 권위주의적인 명령을 선포하기보다는 그들의 행동에 대한 신학적 함축과 사랑의 규범과 십자가의 지혜를 꺼낸다. 이 편지의 신학적 핵심은 그의 설교의 핵심에 대한 반복이다.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연약하고 어리석은 메시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인간적 웅변도 소유하지 못한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 자신의 능력이며 지혜이기 때문이다.


  1. 내적 불화와 십자가의 지혜(1:10–4:21)

바울은 교회공동체에서 지위를 얻으려고 다투고 그리스도를 생명 없는 파편으로 나누려는 자들인 중요인물들 사이의 내부 경쟁 문제를 먼저 다루고 있다(1:10–4:17). 공동체의 와해는 그들의 태도, 판단, 행동 안으로 “세상의 영”(2:12, “세상의 지혜”[1:20; 3:19]와 “이 세상의 지혜”[2:6]는 동의어이다)의 주입에 의해 야기되었다. 바울이 대처하는 문제들 대부분의 배후에 놓인 것은 신학적으로 그릇된 개념이라기보다는 교회 회원들에 대한 세속적 지혜의 해로운 영향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정치적 대항의식의 목적과 그들의 행동을 몰아가는 세상적 지혜를 근절하기 위하여 그 자신의 십자가의 삶의 방식(4:16)을 채택하는 십자가 중심적 공동체에 기인하는 신학적 깊은 사고를 자극하도록 노력한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비전을 결정하는 기초적인 사건이었으나, 그레코-로만 상징들과 신화는 해석적 삶을 위한 틀을 제공하는 십자가와 경쟁한다. 고린도교인들의 경쟁은 그들이 그들 주변의 이방 세계의 사상과 가치관을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바울은 신분과 능력에 의해 매력적이 되는 세상적 패러다임을 십자가의 연약함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패러다임으로 교체하기를 시도한다. 그는 부활의 영광에 의해 개선된 불행한 사건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힘을 숨기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진리에 관하여 청중들이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능력을 신뢰한다. 세상적 지혜에 기초해 명예를 주장하는 자들에 대하여 바울은 인간적인 지혜를 전복하는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를 제공한다. 웅변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기를 갈망하는 자들에 대하여 바울은 성령의 능력의 증명에 의해서만 성취되는 약함, 두려움과 떨림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선언한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맹목적인 갈망을 흡수하고 인간성의 치명적인 결과를 피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구체화한다.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 양자는 그러한 진리를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진리는 그들의 범주와 그들의 사고방식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혜는 부분적인 지식으로 제한되고 그 자신의 자만과 자랑에 의해 판단력을 잃게 된다. 바울은 1:18–3:23에서 인간이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없다는 점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성경으로부터 다섯 구절(1:19; 2:9, 16; 3:19, 20)을 인용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세상에 의해 약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되는 사도들을 통하여 겉보기에는 약하고 어리석은 메시지를 선언하고 세상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간주하는 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되도록 부르시고, 그들의 의로움, 성화와 구속이 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 그들을 연합하심으로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명백하게 하셨다. 이 지혜는 가장 중요한 사역이 치료, 방언과 웅변적 설교와 같은 보이는 것들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고(2:2) 신자들을 공동체 안으로 부르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확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웅변가의 연설이 아니라 성령님은 신자들에게 메시지의 진리를 드러내신다(2:4, 13).
바울에게 십자가의 메시지는 교제에 독이 되는 인간 자신을 칭찬함에 해독제와 같은 것이다. 승리는 삶을 취할 때가 아니라 포기할 때 얻게 된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기적인 지배의식은 신빙성을 상실한다. 수치는 그리스도의 수치스러운 죽음에서 수치스러운 자들에 대한 신적 동일시를 통하여 제거된다. 바울은 종(3:4)과 일꾼(3:6–9)으로 그 자신과 아볼로를 던짐으로 교회에서 지도적 인물의 자기과장을 약화시킨다. 건축가의 이미지(3:10–17)는 마지막 날에 그들의 책무에 관하여 그들을 상기시킨다. 그는 이기주의를 진압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하고 특별히 그리스도인 지도자가 아래로부터 공동체를 섬기도록 인도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복종할 것을 기대한다.


  2. 윤리와 몸의 그리스도의 주되심(5:1–6:20)

5:1–6:20에서 바울을 사로잡고 있는 세 가지 문제(근친상간, 소송과 창녀에게 감)는 1–4장에서 이전의 토론을 보충한다. 이 서론의 장들에서 그는 합당하지 않은 영적 자만심에 의해 길러진 불필요한 투쟁으로 교회가 찢겼다는 것을 은근히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들의 세속성을 드러내고(3:1) 고린도교인들의 우쭐거리는 교만함에 구멍을 내는 역할을 한다.
교회 회원의 부도덕성은 교회의 자랑을 위한 기초들을 위협할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삶을 바꾸는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대한 교회의 증거를 파괴한다. 기독교는 완전히 새로운 성적 윤리와 물질의 소유에 대한 새로운 도덕만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씻음,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통하여 개인의 완전한 변화를 가져온다(6:11).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하게 죄를 깨끗하게 씻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죄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바울의 윤리적 권면은 모든 인류의 마지막 심판과 그리스도인의 부활에 대한 그의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각각의 구절은 종말론적 확신을 포함한다. 근친상간한 남자는 영만이라도 주의 날에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5:5), 성도들이 세상과 천사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확증(6:2), 몸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6:14) 등이다.
바울은 죄악의 행동에 대하여 그들의 무관심한 태도를 제거해 버리려 하며 그들의 죄의 심각함과 회개의 필요성을 납득시킨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도록 예정된 자들(5:7–8; 6:11, 19–20)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일치하는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부활할 예정인 그리스도인의 몸에 대한 선언에 놓이고 그 결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그들의 몸을 위하여 그들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들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자들이다. 성욕을 위하여 창녀를 사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훔치고 그것을 사탄에게 속한 자에게 넘겨줌으로 그리스도의 절대주권을 부인하는 것이다.


  3. 독신, 이혼, 결혼과 하나님의 부르심(7:1–40)

7:1–40에서 독신, 이혼과 결혼에 관한 질문들을 토론함에서 바울은 독신에 대한 그 자신의 편애를 억지로 주장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아래서 그들 자신의 결정을 하도록 신자들에게 여지를 남겨준다(7:6–7, 10, 12, 25, 28, 32, 35, 40을 보라). 고린도에서 바울에게 보낸 그들의 편지로부터 바울의 인용에 의해 증명되는 것처럼(7:1) 일부 교인들은 더 고귀한 선으로 독신을 생각했다. 비록 그가 독신이 좋은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며, 또한 그것이 사람을 더 높은 영적인 지대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바울의 충고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 어떠한 장애물로 놓아서는 안된다는 그의 신학적 확신에 기초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1:9)에 의해 정의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7:17–24에서 이 원칙을 발전시키는데 그것은 토론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탈선(9:1–10:22; 13:1–13을 또한 보라)은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그의 조언을 이끌어가는 신학적 지지를 제공한다.
여기서 바울은 구원이 신자들에게 그들의 인종적, 사회적 신분을 변화시키도록 그들에게 요구하지 않고 제공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7:19)이며 특별히 음행을 피하는 것이다(7:2–5). 그리스도인은 할례를 받았든지 아니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결혼을 했든지 독신이든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다. 어떠한 종교적인 이유로 삶에서 그 자신의 신분을 변화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는 그것이 공덕을 얻는 것보다 세상적 지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에 기초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바울의 조언은 그의 종말론적 관점으로 채워진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을 주심은 새로운 시대가 현재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곧 다가올 종말의 관점으로부터 삶에서 그들의 선택을 평가해야 한다(7:29–31). 마지막 때의 경고는 이 세상의 세속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그들이 결정하는 초점을 예리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이 명백하게 눈 앞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더욱 분명하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보고 판단해야 하며, 죽음의 용광로로 그들을 던져버리려고 하는 세상의 가치와 사상(7:22–23)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4. 우상의 제물과 기독론적 유일신론(8:1–11:1)

우상의 제물에 대한 바울의 긴 토론(8:1–11:1)은 그들의 갖가지 외관에서 소위 신들과 주라고 불리는 것들을 숭배하는 자들에 대항해 하나님의 백성을 정의하는 그의 기독론적 유일신론에 기초해 있다. 세계적인 도시였던 고린도는 갖가지 오래되거나 새로운 종교가 번성하는 종교적 용광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종교적 습관에 모든 신들과 여신들을 조화시켰고 그들은 종교적 습관의 기다란 카페테리아에서 선택을 했다. 하지만 한 분 하나님과 한 분 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아버지로서 그리고 하나님과 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배타적인 충성을 요구한다(8:6).
바울은 우상숭배의 분명한 낌새가 있는 어떠한 의식에도 그리스도인이 참석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는 그것이 우상숭배의 위기로 휩쓸려 들어갈 수 있는 연약한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위험에 노출시키기 때문이다(8:7–13). 그것은 또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고백을 위태롭게 하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로 그리스도인을 이끌어가기 때문이다(10:1–13). 참여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는 주의 성찬은 우상 숭배자들과 귀신들을 묶는 우상제물 식사를 배제한다(10:14–22). 심지어는 우상에게 형식적 혹은 가식적 충성을 보이는 것조차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만 표시해야 하는 충성을 타협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들의 인종적 정체성, 사회적 신분 혹은 성적 성별에 의해 사람을 분류하는 장벽을 허물어 버린다(참조, 10:32). 바울은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권리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관심에서 기꺼이 포기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가 종교적 혼합주의에 접근하지 않고 그 결과 그것이 하나님에게 대하여 거룩함으로 남아있을 수 있느냐와 그리스도에게 신자들의 충성이 모든 다른 매력과 집착을 무시하느냐이다.


  5. 공적 예배에서 단정함과 하나님의 피조물(11:2–16)

다른 현실적인 문제-공적 예배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에 대한 바울의 조언은 피조물과 “주 안에” 있는 존재가 삶을 인지하는 방법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그의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11:11).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역은 사회적 성별 계급제도를 초월한다. 바울은 여자들도 적합하게 머리를 가리면 공적 모임에서 기도하고 예언할 수 있다고 허가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문화적으로 수치스럽다고 조롱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11:6; 참조, 14:35). 머리에 가리는 것을 쓰는 것(11:13)은 여자들에게 있어 개인 정결의 표시이며 그것의 결여는 반대의 것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들 자신들에게 그리고 동시적으로 그들의 주에게 불필요한 불명예를 안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들의 공적 모임에서 품위 있는 모임의 적절성을 보존해야 한다.


  6. 주의 성찬과 그리스도의 희생(11:17–34)

11:17–34에서 바울은 주의 성찬에 대한 고린도교인들의 오용을 수정하려고 노력한다. 주의 성찬은 공동체의 결속을 다져야 했지만, 고린도교인들의 성찬은 그들의 사회적 불평등과 소외를 강조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주의 성찬에서 창피를 당해서는 안되지만, 식사를 하는 고린도교인들의 방식은 가지지 못한 자들이 그들의 동료 그리스도인에 비하여 아주 하찮다고 느끼도록 하였다(11:22). 바울은 그들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하여 마지막 주의 만찬 전통에 호소한다. 고린도교인들은 이기적으로 행동하였으나 예수님은 다른 자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사심 없이 행동하셨다. 고린도교인들의 행동은 비난으로 이끌어 가겠지만(11:29, 32) 예수님의 행동은 다른 사람을 위한 구원으로 이끈다. 부서진 떡과 잔의 조합은 예수님의 궁극적인 희생의 본질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주셨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제공하는 속죄의 죽음에서 자신의 피를 희생하셨으며, 각 신자들은 그분의 희생의 혜택을 동등하게 공유하고 있다. 그런 실체가 주의 성찬 동안 일어나는 것에 의해 상징화되어야 한다. 일부는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 마시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너무 적게 얻어서 배가 고픈 고린도교인들의 주의 성찬관례는 이기심의 문화를 요약하는 것이며, 모든 자들을 위한 주의 죽으심의 의미를 선포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대신에 그들은 자신을 내어주시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하며 그들의 식사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그분의 자기희생과 일치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그들이 가진 것을 서로 다른 자들과 공유하도록 그들을 촉구한다(11:33).


  7. 영적 은사, 영적인 사람과 공적 예배(12:1–14:40)

12:1–14:40에서 영적 은사에 대한 긴 토론은 고린도교인들이 놀랄만한 은사에 대하여 “영적인 은사”로 제한하였으며 영적인 사람에서 역사하는 초자연적 능력의 분명한 표시로 예언 위에 방언을 두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들의 근거 없는 영적인 자만심과 무질서한 예배를 교정하면서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것에 심취한 그들을 완곡하게 비판한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성령으로 물들여지며 그러므로 “예수님은 주시다”라는 고백에 의해 신령하게 된다는 것을 단언하면서 시작하여(12:3) 성령을 나타내는 은혜의 은사의 범위를 확장시킨다(12:4–26).
서신 전체를 통하여 바울은 그들이 간과해 버린 문제의 신학적 함축을 발전시킨다. 바울은 은사, 섬김과 활동의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지만, 그분의 뜻대로 그들에게 공급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성령이시다. 각각의 은사는 공통의 선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영감된 말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역사하는 많은 방법 중에 한 방법일 뿐이다. 어느 누구도 그/그녀가 특별한 영적인 재능을 소유했기 때문에 우월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성령님은 어떤 은사를 누가 얻는지를 결정하시며, 수혜자의 가치에 따라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필요에 맞게 그들에게 배분하신다. 모든 것은 특정한 방법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선물이며 공동체를 세울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의 은사를 사용하도록 격려하신다. 영적 은사는 그 사람의 영적 상태에 대한 척도(indicator)가 아니다.
고린도교회의 파당적 분할은 그들의 구별되는 영적 경험들을 취급하도록 개인들을 자극하는 인간 타락의 부산물이며, 영적인 분류를 사용함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자신들을 올리려는 것이다. 사랑을 칭송하고 있는 13:1–13에서 연관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 탈선은 교회에서 어떠한 은사가 실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원칙을 배열하고 있다.
만약 누가 그들 자신의 특별한 은사(들)를 가장 고귀하고 최고의 것으로 칭찬한다면, 바울은 그러한 은사들이 얼마나 사랑이 없고 가치가 결여되는가를 증명한다. 문제는 어떠한 은사가 가장 유익하고 격려가 되고 혹은 영적이냐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은사를 실행함에서 사랑이 발산되느냐 여부이다. 비록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언급되지는 않지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의 사상을 정의한다. 십자가에 내표된 사랑의 원칙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탐닉의 우쭐됨을 드러내기를 추구하는 지배적인 가치관과 절대적으로 대조를 이루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명예를 항상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교회에서 거의 모든 문제들이 13:4–7에서 언급되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 문제의 원인은 사랑의 부족이라는 것을 넌지시 비추고 있다.
바울은 은사의 연관된 가치를 배열함-특별히 공적 예배를 위한-에서 시금석으로서 교회를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하게 공헌하는 것을 붙잡는다(14:3–5, 12, 17, 26). 외부인을 비롯한 모든 자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의 은사가 가장 효과적이며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열정의 성령님은 또한 질서의 성령님이시라는 신학적 확신에 기초해 예배 중에 하는 방언과 예언에 대해 특별한 조언과 명령을 제시한다(14:26–40).


  8. 죽은 자의 부활과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15:1–58)

서신의 절정은 15장에서 부활에 대한 바울의 긴 토론이다. 고린도교인들은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딤후 2:18)는 것을 확신하지 못했으나 죽은 자의 부활 없는 사후 세계를 믿었다. 그들의 오류는 특정하게 숙고된 교리적 도전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헬라 세계관이 제공하는 혼란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들은 육신적이고 멸할 수 밖에 없는 세상의 몸이 어떻게 영적이고 소멸하지 않는 하늘의 영역에 적합하게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의 몸과 하늘의 존재는 명확하게 다른 것으로 간주되었다. 고린도교인들은 죽음의 때에 죽을 운명의 몸은 뱀의 피부처럼 벗어지고 소멸하지 않는 영은 순전하게 영적인 존재로 계속된다고 생각했다. 15:1–34의 첫 번째 부분은 부활의 실제를 강하게 주장한다. 15:35–58의 두 번째 부분은 어떻게 부활이 가능한지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나타나심을 기록하는 첫 번째 부분(15:1–11)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려 하기보다 부활로부터 논증을 이끌어낸다. 고린도교인들의 일부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15:12)고 말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통일된 사도적 선언을 수용했다. 만약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지 못하셨다고 한다면 그러한 신앙에 기초한 모든 것은 무너질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그분을 따라 그들의 삶을 따르는 자들 또한 하나님에 의해서 부활하게 될 것을 소망하게 된다. 예수님은 또한 다른 부활할 사람들의 대표이며 그 결과 마지막 날의 부활은 불가피하게 예수님의 부활 속편이 될 것이다(15:20–28). 이 부분은 바울이 왜 그렇게 견고하게 죽은 자의 부활을 변호하는지를 밝혀준다. 만약 거기에 아무 것도 없다면 죽음은 정복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세워진 권세로서 종말 배후까지 지배할 것이다. 이 상황은 신학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시기에 죽음은 종말에 정복되어야 한다.
고린도교인들은 어떻게 부활이 가능한지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15:35–58에서 바울은 어떻게 부활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고 단지 그것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상과 하늘 사이에 대립이 존재한다는 그들의 생각과 세속적으로 구체화된 실존이 하늘의 영적인 실존과 완전하게 조화되지 않는다는 그들의 사상을 인정한다.
바울의 여기서의 부활이 시신의 부활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이 세상에 거주하기에 적합한 몸은 천상의 세계에 거주하기에 합당하도록 변화되어야 한다. 자연은 다른 종류의 몸이 존재하며 극적인 변화는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뿌려진 씨가 신기하게 땅으로부터 발아하는 식물이 아닌 것처럼 뿌려진 육신의 몸은 부활하는 영적인 몸이 아니다. 하나님이 씨를 다른 몸에 주시기로 선택하셨기에(15:37), 하나님은 영으로 생기 입은 몸으로 아로새겨진, 부활 때에 성령으로 생기를 입은 몸을 사람에게 주실 것이다(15:42–44상). 사람이 “흙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태어날 때 입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부활 때에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을 것이다(15:47–49). 죽게 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부활하는 자들은 그것의 새로운 천상의 거주지와 일치하는 영적인 몸을 받게 될 것이다. 죄를 사하시고(15:3, 17) 죽은 자를 살리실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 앞에서 죽음은 무기력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편지 전체에 걸쳐 신학과 도덕의 상호관련에 관하여 관심을 보이고 있다. 불건전한 신학은 불건전한 행동으로 이끌어 갈 수 있고 반대로 올바른 신학은 올바른 행동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6:12–14; 15:32–34, 58).


데이비드 E. 갈런드. (2011). 고린도전서. In 케빈 J. 벤후저 (Ed. &amp; Tran.), 신약의 신학적 해석: 신약 각 권 해석 연구 (초판, p 135쪽 – 149쪽). 기독교문서선교회.]]></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Tue, 02 Jun 2026 05:33:5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redirect=11"><![CDATA[묵상의 나눔]]></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에돔을 생각하며]]></title>
			<link><![CDATA[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content_redirect=363]]></link>
			<description><![CDATA[창 36장 / 에서(에돔)의 족보를 읽으며 

광야의 행진을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에돔과 충돌하지 말고 정중한 요청으로 그들의 땅을 통과하기를 원했지만 에돔은 거절하고 결국 이스라엘은 먼길을 돌아야 했습니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하면서 어떻게 이 에돔 종족까지도 이렇게 자세하게 그 이름까지도 기록할 수 있었는지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같이 산 것도 아니고 400년이나 떨어져 살았는데도 에서의 아들들에 대한 기록과 에돔 땅의 족속들 왕들까지도 기록하는 것은 참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말씀해 주셔서 다 알게 되었는지 아니면 그러한 정보들도 다 파악을 한 것인지.. 어떤 것이든 이 에돔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평범해 보이지 않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열두 아들을 얻게 되지만 이후 요셉이 총리가 되었을 때 70명이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을 빅해 본다면 에서에 대한 기록은 야곱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에서가 살아생전에 야곱의 종이 된다든지 아니면 야곱보다 못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야곱과 에서를 서로 비교해 보면 중요한 차이는 결국 약속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있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고 그 약속이 실현되어지는 구조 속에서 드라마가 진행되어 갑니다. 

리브가가 임신 중에 받았던 약속과 이삭의 축복 속에서 선포되어지는 약속들은 그들의 현재를 넘어 역사속에서 펼쳐져 갑니다. 이런 부분들을 우리가 함께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관점입니다. 

에돔의 정치적인 조직이나 번성함과 야곱의 초라함에도 불구하고 누가 약속을 이어가며 이미 주어진 약속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나중에 에돔 족속들이 유대인으로 강제적으로 속하게 되어지고 지금은 에돔 종족은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고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삶과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실현의 장이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민족이나 강력한 정치 체제를 가지고 영향력을 많이 끼친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들이 스스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일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야곱이, 약속을 유업으로 이어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아야 하며 누가 역사를 펼쳐 가는 자들인지를 알아 책임성 있는 삶의 도전을 받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Fri, 08 May 2026 00:18:0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redirect=11"><![CDATA[묵상의 나눔]]></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본다"고 말하는 맹인들]]></title>
			<link><![CDATA[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content_redirect=362]]></link>
			<description><![CDATA[요한복음 9:24-41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과 자신들을 맹인이라고 하는 것 으로 인해 기분 나빠하는 바리새인들이 대조됩니다. 

그리고 "본다"고 할 때 무엇을 보는가? 하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맹인은 보기는 보지만 누구인지 아직 잘 모르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인자"라고 하시자 믿는다고 고백하며 절합니다. 

이에 반해 바리새인들은 "우리도 맹인인가?"라고 반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가 너희가 맹인이 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이 상태를 죄와 연결시킵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 놀라운 기적은 그가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인데도 모세 운운하며 하나님께서 모세와 말씀하신 줄을 알지만 이 사람 예수는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며 자신들이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자들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것 .. 그래서 믿음을 고백하고 절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눈을 떴다고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바리새인들처럼 똑똑한 척 자신은 맹인이 아닌 척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맹인입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할 때에는 그 보지 못함으로 인해 고통하며 절박한 마음으로 보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한데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맹인이면서도 "본다"고 하며 우쭐대고 교만하고 이제 보게 된 사람을 앞에 두고도 자신의 맹인됨을 모르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죄"와 연결시키는 것은 큰 경고가 됩니다. 

보는 맹인과 못보는 멀쩡한 사람에 대한 이 비교는 오늘 우리안에서도 동일한 모습이고 이 일이 우리가 보고자 한다고 보게 되는 일이 아니기에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 우리의 교만과 얄팍한 지식이 우리의 눈을 가려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만들지 않는 것은 오직 우리 안에 가난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나면서부터 맹인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증언하는  것은 우리의 깨달음이나 우리의 지식이 아니라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으로 인한 것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Tue, 03 Mar 2026 08:10:2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redirect=11"><![CDATA[묵상의 나눔]]></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월 주보]]></title>
			<link><![CDATA[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content_redirect=361]]></link>
			<description><![CDATA[2월 주보입니. .]]></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Tue, 03 Mar 2026 07:51:0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redirect=5"><![CDATA[교회 게시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예언된 표적 2:19-22]]></title>
			<link><![CDATA[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content_redirect=360]]></link>
			<description><![CDATA[요한복음을 표적의책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적의 목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고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이 처음 예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어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 그래서 영생으로 들어오는 것 뿐만 아니라 이미 믿는 자들이 그들의 신앙을 더욱 더 돈독하게 하고 그들이 가진 영생을 신뢰하며 더 강하게 붙들게 하려는 목적 두 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표적들이 나타납니다. 이미 가나의 혼례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는 표적은 처음 표적으로 잘 어울리는 표적 같습니다. 처음 창조에서의 결혼식과 처음 표적으로서의 가나의 혼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해 하와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와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누군가 시에서 표현한 것처럼 물이 그를 만든 창조자를 만나 얼굴이 붉어졌다(The conscious water saw its God, and blushed)는 황홀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표적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나타날 표적을 예언하신 표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하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제자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에야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지만 그것을 표적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지만 이미 그것을 표적이라고 먼저 이름 붙여 놓았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은 너희가 성전을 헐었지만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운다는 것을 보여주신 가장 중요한 표적이 분명합니다. 

십자가에 메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조롱하는 사람들이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짓겠다던 사람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십자가에 내려와 보아라(마27:40)"라고 히죽거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신 표적대로 자신이 헐어지는 일을 그대로 다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다윗의 성전의 재건을 유대인들은 소망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돌로짓지 않고 자신의 육체로 지으신 참된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이 조롱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십자가에서 내려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그 말씀처럼 그 이전 돌로 지은 성전의 모든 돌들이 다 헐어지듯 자신의 피를 다 쏟으시며 십자가에 내려 오심을 거부하고 죽음에 이르셨습니다. 

이 허물어 짐이 참된 것이 세워지는 것이었고 그 고통당하심과 죽임 당하심이 성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그 대속의 위대한 한번으로 영원한 제사였다고 하는 것은 감히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역시 이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을 과시하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스스로 증명하려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길은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역사속에서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길을 택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내가 가진 힘이 어떤 힘인지를 보여주려고 한 때가 있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 모습은 기독교의 길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와 위대한 복수를 이루고 자신을 괴롭혔던 자들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 영웅의 길로 보이지만 그것은 십자가의 길은 아닙니다. 

이 성전은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하지 않은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지신 바로 그 십자가로 인해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죄가 사해졌고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다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성전은 건재하고 그 에덴의 임마누엘, 함께 하심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이 새롭게 세워진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Thu, 05 Feb 2026 09:57:1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redirect=11"><![CDATA[묵상의 나눔]]></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월 주보]]></title>
			<link><![CDATA[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content_redirect=359]]></link>
			<description><![CDATA[2026 1월 주보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Wed, 04 Feb 2026 08:56:1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redirect=5"><![CDATA[교회 게시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한 복음 개관]]></title>
			<link><![CDATA[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content_redirect=358]]></link>
			<description><![CDATA[요한복음

S. A. 쿠민스(S. A. Cummins)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경이 거룩하며 영감되고 권위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고 성경을 교회의 신앙과 실천의 상황 내에서 읽었으며, 석의적 다양성과 불일치 가운데서 통일성과 공통의 토대를 추구하였다(참조, Hall 7–42). 우리는 이러한 풍부한 유산과 관련하여 요한복음의 해석과 영향, 메시지와 모티프, 정경 내에서 역할 그리고 지속적으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되는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해석의 역사: 교회와 학계에서 요한복음의 역할

1) 초대교회

오늘날 요한복음에 대한 가장 오래된 해석은 1세기 후반 다소 고립되고 발전된 “요한공동체” 내에서 요한공동체가 구성되는 여러 단계 동안 발생된 본문의 마지막 형태 내에 깊이 새겨져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과정 중에서 분리주의자 무리들과 그들의 이단적 해석으로부터(참조, 요일 2:18–19; 4:1) 요한복음을 구체화하고 보호하려고 함께 노력한 “사랑하시는 제자”(13:23), “복음서 기자”와 편집자와 “장로”(“우리”, 21:24)와 같은 사람들이 두드러진 공헌을 하였다. 더욱이 그런 모든 정통파 노력의 결과는 2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주장된다. 그러다 초창기 열렬한 영지주의자들이 요한복음을 사용하여, 이를 경계하고 주류 그리스도인들이 요한복음을 배척했지만 이레니우스(Irenaeus; 130–200; 특별히 Against Heresies, 약 185년경)의 불굴의 노력으로 마침내 상황은 역전되었다. 이런 면에서 이레니우스는 교회를 위해 요한복음을 구출하고 회복한 것이다(참조, Sanders; Culpepper 107–38).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사도요한과 에베소교회와 소아시아와 더불어 복음서 원전과 접촉을 가졌던 2세기 독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확실히 그 때에 영지주의는 존재했으며 특별히 발렌티안(Valentinian)이 그러했고 그들은 요한복음에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요한묵시록』(Apocryphon of John), 『진리의 복음』(Gospel of Truth), 『도마복음』(Gospel of Thomas)과 다른 저작들, 바실레이드(Basilides)의 인용들, 톨레미(Ptolemy)의 서론에 대한 주석, 헤라클레온의 첫 번째 전체 주석과 데오도투스의 해석(모든 것이 약 130–80년경이다)과 같은 작품에 나타난다. 요한복음이 창조, 기독론과 구원에 대한 영지주의 입장과 다르다는 것이 확실하기에 그런 관심은 승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논쟁과 거절을 의미한다(Hill 205–93을 보라). 비슷하게 몬타니스트(Montanist)는 성령에 대한 그들의 비정통적 견해를 지지하도록 요한복음에 호소하기도 했다.
2세기 초반 요한복음에 대한 광범위한 교회적 소유권을 가리키는 것 중 상당히 과소평가된 증거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이그나티우스(Ingnatius), 폴리갑(Polycarp), 마가복음의 더 긴 결말, 장로 요한, 아리스테데스(Aristides), 파피아스(Papias), 허마스의 목자(the Shepherd of Hermas), 『사도들의 서신』(Epistula Apostolorum)과 같은 작품과 가르침에 나타난다. 요한복음의 영향력과 명성은 초기의 파피루스, 저스틴(Justin), 타티안(Tatian),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멜리토(Melito),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 『비엔느와 리용의 서신』(Epistle of Vienne and Lyons), 헤게시푸스(Hegesippus), 폴리크레테스(Polycrates), 『모라토리안 단편』(Muratorina Fragment), 아폴로니우스(Appolonius), 터툴리안(Tertullians)에 의해 입증된다. 요약하면 요한복음에 대한 익숙하고 지속적인 사용은 초대교회 내에서 요한복음이 권위있는, 사실상 정경적 기능을 하였다는 것을 드러낸다. 물론 이러한 것에 이견의 목소리(로마의 가이오라고 하는)가 분명하게 존재하기는 한다(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Braun; Hengel; 특별히 Hill을 보라).
그 이후 교회는 목회적이고 변증적 목적 두 가지를 위해 요한복음의 신학적 깊이를 계속해서 측량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215년경 사망)는 요한복음을 공관복음서와 연결하고 원본의 영감된 사도적, 공동체적 상황을 상기시켰고 요한복음의 독특한 본질을 요약하였다. “최종적으로 외적 사실들을 복음서 안에 실어야겠다고 생각한 요한은 제자들에게 재촉을 받고 성령의 신적 운행 속에 영적 복음서를 써내려갔다”(Eusebius, History ecclesia 6.14.7).
비슷하게 요한복음의 독창성을 강조하고 사복음서 중에서 최상의 것이라고 말한 오리겐(185–254)은 요한복음의 지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분간함을 추구함으로 문학적이고 풍유적 관점 양자를 수반하는 요한복음 주석을 저술했다. 그는 개인적이고 독단적인 해석을 위해 헤라클레온(Heracleon)과 같은 사람을 비판하였는데 교회적 증거는 부족하였다. 오리겐에게 요한복음은 아버지 안에 있는 바로 그 말씀을 드러내고 있기에 그것은 모든 인간적 해석을 요구한다(Schnackenburg 202–3).
3–4세기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와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서 증거되는 것처럼 요한복음은 기독론과 삼위일체 논쟁에서 아주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Pollard). 예를 들면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성육신)과 신성 양자를 주장하는 요한복음 1:1과 1:14을 연관해 대조로서가 아니라 보충으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에게 예속되었다는 아리우스(Arius)의 견해와 충돌하게 되었고 신비적 연합으로 둘을 결합한다.
크리소스톰(Chrysostom, 347–407년)은 그의 책 『요한복음 설교』(Homilies on the Gospel of John)에서 아리안주의와 논쟁하였는데 그것은 교회의 실제적 필요를 위해 요한복음의 계시적, 신학적, 영적 특성을 강조한 목회적이고 논쟁적인 상당히 영향력 있는 시리즈이다. 몹수시아의 데오도르(Deodore of Mopsuestia, 428년 사망)의 주석과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 376–444)은 니케아신조가 확인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고 그의 신성과 인성 사이의 구별 둘 모두를 지지하면서 요한복음에 많이 의존하였다(Schnackenburg 204; Wiles 129–47).
그런 강조들은 어거스틴의 중요한 『요한복음 논문』(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에서 또한 증거되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의 신비를 목회적으로 적절하게 설명한 124편의 설교이다. 어거스틴은 요한복음의 심원한 신학의 자료를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복음 저자의 특권적인 근접성(요 13:23)-그분께 기대고 그분의 모든 비밀을 받음으로 그리고 마음을 정련함으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는 복음을 출판함으로-에 돌린다. 공관복음서 기자들과 비교해 볼 때 “복음서 기자 요한은 독수리처럼 더 높이 날아 오른다. 그리고 진리의 빛을 더욱 견고히 응시하기 위해 땅을 덮은 어둡고 뿌연 안개 위로 솟아 오른다”(Tractate 15.1).


2) 중세시대에서 종교개혁까지

요한복음에 대한 교부들의 석의-동방에서는 크리소스톰이, 서방에서는 어거스틴이-가 중세시대 동안 해석을 지배하였다. 더욱 중세의 주석은 교부들의 자료를 단순하게 모집하고 요약하는 형태로 나타났고 요한복음에 집중한 다수의 작품들이 있다(Kealy 1).
부주교였던 비디(Bede, 673–735년)는 요한복음 서두에 관한 소책자를 적었고 알쿠인(Alcuin, 740–804)은 넓게 유통되고 많은 개정판이 나온 주석을 펴냈다. 요한 스코투스 에리게나(John Scotus Eriugena, 810–77) 또한 요한복음 서론에 대한 소책자와 완성되지 않은 주석을 남겼다. 그 이후에 비잔틴 주석가인 데오폴럭투스(Theophylactus, 1050–1125)도 주석을 남겼다.
또한 수도사인 루퍼트(Rupert, 1075–1129)는 800페이지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것은 어거스틴의 노력을 인지하고 보충하기 위해서였으며, 고대 기독론적 이단들과 논쟁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숙고하고 있다. 보나벤츄라(Bonaventure, 1217–74)는 자체가 신적인 말씀(1:1–6) 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인성과 결합된 것으로서(1:7–21:25) “장엄한” 복음을 반영하는 저 유명한 『요한복음에 대한 간단한 주석』(Postilla on the Gospel of John)과 더불어 이단에 응대하기 위해 작품을 남겼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74)의 요한복음 주석은 학문적으로 중세 최고의 석의이다. 그것은 오리겐,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을 광범위하게 인용하며 아리안주의로부터 펠라기안(Pelagians)까지의 모든 오류를 반박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것은 또한 조심스럽게 본문의 문자적(의도적) 의미를 수반하고 있으면서 그것의 3중적인 영적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요한복음으로부터 이끌어 낸 중요한 주제들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사랑, 성육신, 구속하심,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 요한복음의 참된 진리, 권위와 명상적인 무게 등을 포함한다. 그 이후 중세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는 복음서 기자 요한을 위로부터 자세히 조사하고 숙고되고 전파된 것으로 묘사하기 위해 친숙한 독수리 이미지를 사용했으며, 그의 말씀의 복음은 굶주린 인간성의 허세와는 반대로 육신이 되었다(Kealy 1:115–84).
요한복음은 또한 종교개혁 시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516년부터 1555년에만 30여명 이상의 저자들이 요한복음에 대한 125개 이상의 개별적 인쇄물을 출판하였으며 그 중에서 많은 것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유명한 『요한복음에 관한 석의』(Paraphrase on John)를 쓴 에라스무스(Erasmus 1469–1536)는 1519년 그의 라틴어 번역판에서 요한복음 1:1을 불가타성경의 “말씀”으로 하지 않고 “담화/강화”(Speech/Discourse)로 적음으로써 논란을 일으켰다. 요한복음에 대한 첫 프로테스탄트 주석인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은 이것을 발전시켜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연설”(oration)이라고 하였다. 그는 어떤 구절을 읽을 때 기독론적이고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함으로써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을 추종했다. 그는 또한 아퀴나스의 학문적 주석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 당시 사람으로서 그는 요한을 르네상스 역사가 중 한 사람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경건한 수사학자로 간주하였다. 다른 중요한 작품들은 마틴 부쳐(Martin Bucer, 1491–1551), 프랑소와 티털먼스(François Titelmans, 1502–37), 볼프강 머스큘러스(Wolfgang Musculus, 1497–1563) 등이 포함된다(Farmer를 보라).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요한복음 주석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신약성경 중에 영예로운 자리를 이 책에 돌렸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약된 초점이 그분의 신성과 구원의 의미를 강조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 탐구하였다. 존 칼빈(John Calvin, 1509–64)도 요한복음을 다른 복음서들을 이해하는 열쇠로 보았으며 그 안에 담긴 풍부한 기독론을 선호하였다. 전형적으로 그의 주석은 신적 의도와 본문이 가진 변화의 영향력에 주목하고 있다(Kealy 1:203–74; 참조, Larsson).


3) 계몽주의로부터 현재까지

계몽주의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성경학, 특히 예수와 복음서와 관련하여 점차 이성적이고 역사적이며 가끔은 회의주의적인 접근이 늘어나게 되었고, 이는 요한복음에까지 미쳐 이것의 역사적 가치와 독특한 신학적 본질마저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마가복음과 같은 복음서가 원래의 환경과 유대인 예수님의 활동에 우리를 더욱 가깝게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이듯 매우 색다른 책인 요한복음도 대부분 더욱 낯설고 헬라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후기 “공교회 기독교”(Catholic Christianity; 초대교회의 케그리마에 의한 지도력, 사람에 의해 임명된 직분자의 부재에서 점차적으로 임명된 지도자에 의한 지도력과 직분자와 교회구조가 형성되어 발전한 기독교-역주)가 신학적으로 가미한 구성으로서 생각된다. 그러한 견해는 1820년의 영향력 있는 브렛슈나이더(Bretschneider, 1776–1848) 주석과 바우어(F. C. Baur, 1792–1860)와 스트라우스(D. F. Strauss, 1808–74) 아래서 튀빙겐학파의 광범위한 작품에서 더욱 넓게 증거된다. 그것은 요한복음의 저자, 연대, 목적, 통일성과 의의에 대한 회의주의 입장의 증식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좀 더 온건한 입장도 존재하였다. 1832년 강의에서 슐라이에르마허(F. Schleiermacher, 1768–1834)는 요한복음을 예수님의 “심오함과 본질”을 보여주는 신뢰할 만하며 진실한 증거로 간주하였다. 1,500페이지의 방대한 주석을 남긴 프레드릭 룩케(Friedrich Lucke, 1791–1855)는 요한복음을 진정한 사도적 복음서로 간주하였으며 역사적 내용과 영적인 이해를 결합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1881년의 웨스트콧(B. F. Westcott, 1825–1901)주석은 요한복음의 사도적 기원을 방어하였고 세상(1:19–12:50)과 자신의 제자들(13:1–21:25)을 향한 그리스도의 자기-계시에 초점을 맞춘 것을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분석하였다. 20세기 초까지 학자들은 요한복음을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이며 복음에 관한 2세기의 헬라적 진술로 간주하였으며, “실제적” 예수님이라기보다는 “관념적”으로 그리고 있다(참조, Kealy 1:357–471)고 생각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요한복음에 대한 학계의 해석은 상호 연관된 문제들의 특별한 것들에 관한 경쟁적이고 미묘한 차이가 나는 주장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주로 요한복음의 배경, 공관복음과의 연관, 자료들, 구성과 공동체 상황이다. 불트만의 영향력 있는 주석(1941; 영어 번역은 1971; Ashton을 보라)은 지중해 영지주의에서의 배경에 대해 논쟁함으로 종교사학파와 헬라적 접근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대신에 요한복음의 유대주의 배경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올바르게 인지한다. 요한복음은 1세기 팔레스틴의 지리, 관습과 문화와 아주 익숙해 있다. 요한복음의 언어와 이미지는 사해문서에 의해 입증되는 것처럼 유대주의 요소와 근접한 병행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이런 동일한 증거는 요한이 실제로 요한복음 자체의 초기와 진정한 예수님 자료들을 보존하였다는 것을 잘 암시하며 공관복음으로부터 신뢰할 만하고 독립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Dodd). 요한복음에 대한 이 “새로운 전망”은 연대, 사도적 저자성, 역사적 예수님에 대한 증인과 같은 기본적인 생각을 다시 하게 하며(Robinson), 그것은 부가적 제안을 위한 분명한 토대로서 광범위하게 취해질 것이다.
공관복음에서 끌어내었다기보다는 요한은 일반적 전통, “이적,” “담화”와 다른 자료들을 사용하였을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편집자에 의해 구성됐을 것이다(참조, Fortna). 사도적 저자의 근본적인 증인을 요구하기보다는 요한은 순차적 구성과 요한공동체, 집단 혹은 학파로서 추정되든지 공동체적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 일반적인 논의이다(Martyn; Brown).
이러한 확장되고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가설들로부터 생긴 순이득을 경시하거나 잊어버림 없이, 나는 초기 주석가들이 요한복음 메시지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한 신학적 근본 관심사를 그들이 매우 자주 빗겨가고 주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행히 요한복음에서 내러티브, 상징, 신학적 그리고 영적인 특성에 관심을 가짐은 이제까지 간과한 것과 불균형을 교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예를 들면 Kelly와 Moloney; Schneiders; Thompson).


  2. 메시지와 모티프: 요한과 신적 생명의 드라마

요한복음은 인류와 세상의 구속과 재창조를 계시하고 규정하는 2막의 신적 드라마를 서술한다. 서막은 신적 생명과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말씀이 세상 안으로 들어옴을 밝힌다. 제1막에서 신적 뜻은 순종의 사역과 말씀 안에서 드러난다. 제2막은 예수님의 탄생, 죽음과 부활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후기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세상에서 신적 생명을 계속 구현해 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참조, Smalley 141–54).


1) 서막: 하나님, 말씀과 세상(1:1–18)

서막은 신적 드라마에 드리운 막을 들어올린다. 초월적이고 원시적인 장면은 하나님으로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교제 안에 계신 선재하신 말씀을 소개한다(1:1–2). 이것은 신적 생명이며 후에 우리는 성령을 포함한다는 것을 안다(1:32). 이 삼위일체적 친교로부터 나오는 공동 창조주이신 말씀은 자신 안에서 유지되고 조명되는 신적 생명과 빛을 가진 인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함과 함께 창조된 질서를 만들었다(1:3–4).
하지만 이 모든 것과 더불어 말씀은 또한 “그/이”(1:2)로서 확인된다(Kelly와 Moloney 34–35). 하늘에서부터 땅의 영역으로 장면이 놀랍게 바뀌면서 우리는 현재의 어두운 세상을 극복하기 위하여(1:5) 공동 창조주가 인간으로서 창조와 역사 안으로 들어가신 것을 발견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1:14). 이 놀라운 사건의 첫 번째 목격자는 세례요한이며 그는 신적 빛이 나타나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며 그를 통하여 믿게 되었다(1:6–7, 15). 하지만 동일하게 놀라운 것은 세상은 자신의 창조자로서 말씀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은 그들이 그분의 것이라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1:8–11) 그분을 거절함으로 그들 자신은 참된 자신을 부정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말씀의 신적 기원, 정체성과 구원하시는 사명을 수용함으로 그의 이름을 믿고, 그리하여 그들은 단순히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1:12–13). 말씀이 신적 영광과 진리로 충만하게 성육신하신 방법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세상과의 관계 양자에서 더욱 독특하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 독생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다(1:18). 그리하여 서막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목적을 증거하고 수신자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다(20:31). 이러한 방법에서 그들은 “은혜 위에 은혜(토라의 주어짐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주심까지 추적할 수 있는 신적 구속의 성취하심)”(1:16)의 수혜자가 될 것이다. 일어나는 모든 것의 규모로 볼 때 그것은 드러냄, 증거와 믿음의 고백으로서만 분간할 수 있는 것이다(“우리가 보니,” 1:14).


2) 제1막: 하나님 아버지는 사역과 말씀 속에서 아들 예수님을 드러내셨다(1:19–12:50)

서막의 신적 패턴과 목적은 1세기 이스라엘 내에서 예수님의 공적 직무에 관한 출현과 드러남과 더불어 가시화하는 것이다. 제1막은 예수님의 계시적이고 회개시키는 사역과 말씀(이적과 담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은 대표적인 인물들과 그룹들 간 일련의 만남을 포함하는데 이들은 점차 그분을 거절하거나 따르는 자들로 나뉘어진다. 이러한 매우 격렬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중요한 문제와 주제가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처음에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직무를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 신적 생명이 세상으로 오셔서 전적으로 기대하지 못하고 자기희생의 방법으로 그들에 대한 기소장을 다시 적으심으로 그들을 완전한 버려짐에서 건져 내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주 열정적이지면서도 아직 깨닫지 못하는 자신의 새로운 동료를 부르신 후에(1:35–51) 예수님은 도발적이고 의미심장한 에피소드의 연속으로 이스라엘의 일상적인 풍습에 도전하신다.
가나에서 유대주의 정결예식은 신적 영광의 새로운 포도주로 변한다(2:1–12). 예루살렘성전에서 사건은 회복 불능이며 종결된 유대주의 조직이 예수님 중심적이며 성령으로 보충된 포괄적인 공동체로 대체된다는 것을 예시한다(2:13–22). 전형적이고 너무나 자기 확신에 찬 니고데모(“우리가 아나이다,” 3:2)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님과 성령의 모습으로 “위로부터” 오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여야 한다(3:1–21). 사마리아 여인은 구원은 유대인에게서가 아니라 신적 계획 내에서 모든 신실한 예배자들에게 이르며 그들을 포함하시는 메시아 예수께로부터 나온다(4:1–42). 이 놀라운 시나리오는 믿는 이방인 신하와 예수님의 연속하는 추가적 만남에서 더욱 확장된다(4:46–54; 참조, Kelly와 Moloney 61–114).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은 더욱 다방면에 걸친 연속이 나타나는데 모든 것은 다양한 상징적인 유대주의 축제의 배경에 대항하여 두드러지게 놓인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고침을 통해 거룩한 날과 그 날의 주인을 압박하는 “유대교”를 비판하고 계신다. 또한 아들이신 그가 새롭고 권위 있으며 생명을 주는 방식으로 아버지를 드러내고 계신다(5:1–47). “유대교”의 불합리한 반-셈족 이해의 견해에서 볼 때 요한복음에서 이 구절은 예수님 안에서 신적 경륜을 대적하거나 혹은 가까이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암호이다.
유월절이 가까이 온 때에 오천 명을 먹이심, 물 위를 걸으심, “하늘에서 내려온 떡” 강화,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신적 기원(“나는…이다,” 6:35)과 자신의 백성을 위해 한량없는 공급하심을 드러낸다(6:1–71). 초막절은 예수님의 연속하는 성전 가르침을 위한 배경이 되며 그분을 체포하는 데 실패한다. 세상의 빛, 다가오는 죽음, 제자도, 아브라함에 대한 강화와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만나는 사건이 계속된다(7:1–9:41). 이런 모든 사건들에서 참되고 살아 있는 생수, 빛, 영광스러운 신적 현존(“나는…이다,” 9:12)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들다,” 8:28)과 연관된 분은 성전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신적 사역은 참된 자유, 판단, 증거와 예배에 영향을 미치며 이것은 삶, 사랑과 진리로 특징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러 일으킨다.
수전절(하누카, 10:22)에 대한 언급의 한쪽 면에서 우리는 선한 목자에 대한 예수님의 담화와 “유대교”가 그분을 거부하는 기사를 보게 된다(10:1–42). 후자는 이전에 이스라엘의 이전의 실패한 지도자들과 연결되고(겔 34장) 풍성하신 영원한 생명에서 모든 인간적 요구와 논쟁을 극복하는 아들의 대속적 자기희생에서 아버지의 이기심 없는 사랑의 부어주심과는 대조된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와 나(예수님)는 하나이다”(10:30)고 하신 신적 생명으로부터 기원한다. 이 주장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호하기 위한 관심을 가진 자들로부터 신성모독의 고발을 초래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10:38)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깨닫는 데 실패한다.
두 가지 보충적인 장면-나사로를 살리심(11:1–57)과 마리아가 예수께 기름을 부음(12:1–8)-은 제2막의 주제인 그분의 역설적인 죽음과 부활을 예기한다. 하지만 제1막은 예수께서 극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심, 이방인과 유대인과 대화하심 그리고 날짜를 추정하려고 그분의 직무를 곡해하는 것에 대한 요약으로 마무리한다(12:12–50).


3) 제2막: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화롭게 되신다(13:1–20:31)

제2막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다가오는 죽음과 그 후의 제자들의 역할에 대하여 자신의 제자들을 준비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알게 된다(13:1–17:26). 그런 사건들 후에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부활을 포함하는 사건들의 점층적인 묘사가 즉각적으로 뒤따른다(18:1–20:31). 사역과 말씀에서 아버지와 성육신하신 아들의 관계는 예수님의 수치스러운 죽음, 놀라운 입증과 영원한 신적 생명의 부활에서 그분들이 공유한 영광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인지된다. 다시 한 번 모티프의 부요함이 전체를 통해 분별된다.
유월절과 자신의 때가 가까웠다는 양자와 더불어 하나님의 바로 그 어린양은 자신의 희생을 예상하시고 자신이 종이 되셔서 겸손하게 제자들의 발을 씻으심의 방법으로 제자들의 몫을 위하여 그들을 준비하신다. 배신자 유다와 이해가 부족한 제자들이 참석함으로 이 행동은 예수님의 본이 되심과 무한하신 사랑을 표현한다(13:1–38). 이것은 또한 궁극적으로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신적 환대의 표시이다(“내 아버지의 집,” 14:2). 이것은 예수께서 떠나심과 거하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실 성령의 오심으로 가능하게 될 것이다(14:1–31). 이 모든 것에서 그 자신이 “길과 진리와 생명”(14:6)되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의 제한된 시야를 넓히도록 권면하신다(“일어나라 우리가 우리의 길에 서자,” 14:31 NRSV). 그리하여 그분은 비록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서이지만 그들에게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영역 안의 집을 향해 자신을 따르도록 불러내신다(Kelly와 Moloney 270–306).
예수님과의 연합(“참 포도나무”)과 그분이 보내신 성령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며 사랑과 기쁨의 열매 맺는 삶이 가능하도록 한다. 이것은 증오에 차고 타락한 세상의 무익한 실존을 극복하게 할 것이다(15:1–16:3). 예수님은 신적으로 예정되었으나 아직 혼란스러운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시고 자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그것의 유익을 고려하심으로 이러한 주제들을 발전시키신다. 십자가는 세상의 죄와 불의를 폭로하고 근절할 것이며 성령은 사랑, 기쁨과 평화의 형태로 아버지의 무한한 새 언약의 삶을 가져올 것이다(16:4–33). 그런 다음 기도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 제자들을 위해, 모든 신자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소망과 두려움을 함께 묶으며 아버지와 그 자신의 영원한 교제 안으로 그것들을 이끌고 가신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순종적인 직무 안에서 발견되며 아버지와 아들 사이 상호영화와 더불어 다가오는 “시간”에서 절정에 이른다(17:1–26; Kelly와 Moloney 307–51).
역설적이게도 배신, 예수님의 체포, 심문과 죽음에서 인간의 자기 파괴적 계획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대한 계획 안으로 흡수된다. 겟세마네에서 아주 확신에 찬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정체성(“내가 그로다,” 18:6)을 당국자들에게 드러내시고 자신의 “아버지께서 주신 잔”(18:11)에 복종하신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버림받으며, 심지어는 베드로도 그를 부인한다(“나는 아니라,” 18:17). 닫힌 문 뒤편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자신이 성전과 회당과 세상에서 하나님에 관하여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관계에서 자신에 대하여 항상 공개적이고 올바르게 이야기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18:19–24). 당혹한 로마 총독 빌라도(“내가 유대인이냐?” 18:35)는 자신이 기이하지만 죄없는 것 같은 “메시아”와 최고조의 갈등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그분은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18:28–38상)라고 빌라도에게 정확히 알려주신다.
모든 관련된 것을 벗어나고 뒤엎는 신적 논리는 드러난다. 거짓된 “유대인”은 가이사가 그들의 왕이라고 선언한다. 역설적이게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름으로 경의를 돌린다(19:19–22).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과 숙명을 밝히시며 그리하여 하나님을 드러내시며 영광스럽게 한다. 그러므로 비록 상황은 빼앗긴 제자들에게 재앙으로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역전이 된 입장이다. 빈 무덤은 다시 나타나시고 “주와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시며 성령을 남겨두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입증하며, 성령의 형태로 그분은 자신의 제자와 계속해서 함께 하실 것이다(20:1–29). 그런 후에 그분은 “내 아버지 곧 나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20:17)께로, 예수님,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께서 주신 신적 생명을 믿고 받는 모든 자들이 기쁨을 누리도록 영광 중으로 승천하신다(20:30–31).


4) 후기: 몸을 입은 신적 생명(21:1–25)

아마도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추정되는 후기에서 예수는 다시 나타나시고, 신실한 증인으로 남고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도록 하기 위하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를 포함한 그의 모인 제자들에게 자신을 다시 권면하신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이 영적인 복음을 제공하였는데, 이 복음은 청중들을 초청하여 예수와 사도들과 신적 생명을 가진 모든 성도들과 연합할 수 있게 한다.


  3. 정경: 요한복음과 거룩한 동료문헌들

요한복음은 신앙에 관하여 증거하는 공동체 내에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상기되는 것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에 의해 형성된 계시적이고 영감된 새 언약 문서의 역할을 한다(참조, 14:25; 20:21–23, 30–31; 21:24–25). 이러한 기초 위에 저자와 최초의 청중은 이 신적으로 권위있는 성경을 보존하고 전달하고 선포하였다(참조, 2:22; 19:36–37; 20:31). 이 복음서가 정경으로 수용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학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이 초대교회에서 넓게 수용되고 인정되었다는 것과 그것이 독특하고 두드러지고 실제로 정경적 역할을 했다는 암시가 존재한다(Hill을 보라). 이런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요한이 구약성경을 사용했다는 점 그리고 초기 요한전집과 공관복음서 둘 사이에 놓인 관련성이다.
요한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예수님 안에서 세상과 그분의 성령으로 권능을 받은 제자들에 대한 그것 자신의 증거를 보았다는 것은 구약성경과 일치한다(5:39, 45–47). 이것은 예수께서 다양하게 인용하시고(1:51; 6:45; 10:34; 13:18; 15:25), 그 당시 유대주의자들(1:23; 2:17; 6:31; 12:13) 그리고 이 저자가 인용(12:15, 38, 40; 19:24, 36–37)한 구약성경의 인용 특히 모세오경, 이사야와 시편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분명해진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예수님의 메시지와 직무에 대한 요한의 설명이 다양한 구약성경 요소들에 대한 예표론적이고 논쟁적인 재직업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상징(토라, 성전, 안식일), 인물(모세, 이사야의 종, 시편의 고난 겪는 의로운 자, 에스겔의 다윗적 목자), 이미지(포도주, 물, 빛)와 절기(유월절, 초막절) 등을 포함한다. 그리하여 요한이 선지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전체 구약성경에 관하여도 참이 된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12:41). 부활 후의 요한의 관점에서부터 이사야가 미리 보고 구약성경이 예상하고 약속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 표현이신 십자가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이다. 결국 이것은 구약성경, 예수님 그리고 요한복음의 집합적 증거의 중심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요한복음만이 아니다. 이 문서는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들, 특별히 요한이 기록한 서신들과 요한계시록과의 비교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복음서와 특별히 요한1서 사이 아주 많은 놀라운 단어적, 개념적, 주제적 유사성이 잘 인식되는 배치는 우연이라고 하기 힘들다. 예들 들면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 보혜사와 “진리의 성령님,”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자들, 사랑의 계명, 빛과 어두움의 이미지, 진리, 증거와 영생에 대한 강조,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 머물라는 권면 등이 이런 것들이다.
이러한 요한서신의 수신자들 모두는 처음부터 복음서 그 자체를 통하여 듣고 보았을 것이다(참조, 요일 1:1; 2:7, 24; 3:11; 요이 5, 6). 요한계시록이 복음서라기보다 편지의 형태로 기록된 묵시적 예언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두드러진 기독론적(양, 말씀)이고 종말론적인 유사성이 있다. 그것은 유사한 두드러진 주제들(증거, 계명의 준수, 극복, 영광스럽게 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구약성경 언어와 이미지를 광범위하게 환기시키도록 이끌어낸다(참조, Bauckham, Revelation; Keener 1:122–39; Köstenberger 203–5).
더욱이 학계가 요한복음, 요한서신들과 요한계시록에 대한 기원과 정체성을 보통 개별적인 것으로 고려하지만, 거기는 또한 그것들이 권위 있는 전집에 속하였다는 2세기 초 교회의 자각에 대한 강한 증거가 있다. 이런 진술은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요한문서들의 일반적이고 가끔은 상호본문적 석의에 의해 확증될 것이다. 그것들은 암시적, 명시적으로 저자를 동일 인물, 즉 사도요한으로 본다. 이러한 요한문헌들을 포함하는 사본들이 존재할(Hill 451–64) 가능성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요한복음의 명백한 독특성은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마태, 마가와 누가를 서투르게 따르기보다는 그것이 독립적으로 나타났다는 결론에 이르도록 한다. 그것의 시작부터 요한은 특별히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이고 말씀이신 예수님에 관한 많은 것들을 전제로 하며 이것은 공관복음서 같은 문서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Smith). 초대교회와 발전된 그리스도인 공동체 사이의 광범위한 조직과 복음서 각각이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해 의도되었다는 개연성에서 볼 때, 그것들이 다른 각각에 대하여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더욱 그럴 듯 하다.
사실 2세기 증거(Tatian과 Clement로부터 그런 것처럼)는 교회가 마태복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대한 완전한 지식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요한복음이 곧 그들 가운데 배포되었다는 것이며 그것은 의도적으로 가장 마지막에 자리하는데,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의 짝을 위하여 더 넓어지고 깊어진 신학적 틀을 분명하게 하고, 확대하고 보충하며 제공했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독자는 요한복음을 복음서 중의 복음서로서 읽도록 초대되며 요한복음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 구약성경 내에서 완전한 문서로 간주하도록 한다.


  4. 요한복음과 신학: 하나님, 교회 그리고 세상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즉 요한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기원에 대한 요한복음 자체의 사도적이고 공동체적 문맥 내에서 가장 먼저 증거된 것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요한복음의 발현, 점차적으로 초대교회 안으로 포함되고 확장된 후 요한복음의 신속하고 광범위한 수용, 성령으로 형성된 성경으로 가장 초기부터 간수되어 상호 연관되게 하는 해석적이고 정경에 포함된 요한문헌들, 교회역사와 일반역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요한복음이 끼친 심오한 영향, 해석, 해설, 제정 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은 단순한 인간적 추측과 이기적 분파주의의 읽기에서가 아니라 항상 교회적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그로 인하여 온 세상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희생적이고 무한하신 사랑에 대한 풍성한 증거로서 증명된다(3:16; 21:24–25).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이 영광스러운 사랑은 모든 것을 선행하고 초월하며 창조하고 발생시키며 유지하고 성취한다. 성자 하나님 안에서 이 사랑은 그것이 죄와 죽음을 폭로하고 극복하는 것으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형을 받으셨으며, 그것이 생명의 길을 열어놓고 가능하게 하신 것으로 입증되고 영광스럽게 되셨다. 아들의 계속적인 현존인 성령 안에서 이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세우시고 내주하시며 지탱하시고 증거하시며 인도하신다(참조, Kelly와 Moloney 388–94).
세상에서 교회와 그것의 사명을 다스리고 입증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적인 사랑이다. 교회는 현존하며 신실하고 주는 곳이다. 그것은 치료하고 도우며, 견디고 탐구할뿐 아니라 직면하고 변화되어야 한다. 그것은 또한 손을 내밀고 초청하며 모이고 환영하며 포함하는 곳이다. 확실히 그런 사명은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의 방향으로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반대로 까다로운 편협주의로 퇴보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항상 이러한 하나님의 교회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인류가 그것의 참된 정체성과 숙명을 알 수 있는 천상의 영역과 경륜을 드러내는 긴요하면서 상처 입기 쉬운 사랑과 신실함과 더불어 모든 교회의 장엄함 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체화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입에 담기도 싫은 추악한 악에게 예속된 세상은 섭리 중에 구원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질 것이며 영원한 신적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S. A. 쿠민스. (2011). 요한복음. In 케빈 J. 벤후저 (Ed. &amp; Tran.), 신약의 신학적 해석: 신약 각 권 해석 연구 (초판, p 83쪽 – 101쪽). 기독교문서선교회.]]></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Wed, 04 Feb 2026 08:54:3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redirect=11"><![CDATA[묵상의 나눔]]></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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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임직식 기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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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img src="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8/202601/695e2c198773d8965531.jpg" alt="" />]]></description>
			<author><![CDATA[sunmin_admin]]></author>
			<pubDate>Wed, 07 Jan 2026 20:49:4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redirect=8"><![CDATA[Photo Essay]]></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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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창 3:8을 묵상하며]]></title>
			<link><![CDATA[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content_redirect=356]]></link>
			<description><![CDATA[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이 구절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익숙하면서도 그냥 스쳐 지나가게 만들기도 합니다. 창조 기사에서 많이 사용된 단어들이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날
바람이 불 때 /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
소리 
아담과 그의 아내
여호와 하나님의 낯/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 
동산 나무
빛이 있으라/ 숨은지라 

마치 창조의 첫날을 거슬러 다시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모세가 단순하게 이 상황을 하나님께서 좀 시원한 시간인 아침 일찍이나 저녁 해가 질 때 동산에 찾아 오셨다고 표현하기 위해 바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지 의문이 듭니다. 특히 이 단어 바람은 하나님의 신을 표현하는 단어이기고 하나님의 임재를 강력하게 시사하는 단어로 성경 처음에 사용된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그 상황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셨듯 그 에덴 동산을 운행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던 그 여호와의 소리도 그렇습니다. 이 소리가 어떤 존재의 인기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음성으로서의 소리가 분명하고 그렇다면 이 소리도 창조 기사에서 반복되었던 그 말씀과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했다는 것은 우리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의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하필 동산나무라고 표현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생명 나무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의 연결을 생각하게 합니다. 
숨겨졌던 창조 이전의 상태를 빛이 있으라고 드러내시고 그 창조의 시작을 하셨는데 이제 이 인간들이 숨어드는 어둠 속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죄가 가져온 참담한 결과가 단순히 숨었다는 것에 포커스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엄청난 결과를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생각은 성경을 묵상하며 드는 생각이기에 연구가 더 필요해 보이지만 성경을 기록한 모세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인간의 범죄가 가져온 창조 세계에 가져온 전반적이고 치명적인 결과들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하나님의 회복 역시 성령과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이루어지며 다시 그 얼굴 빛 앞으로 나아가며(계 22:4) 다시 생명 나무 사이를 거닐며 누리고(계22:2) 다시 숨을 필요가 없기에 밤이 없는(계22:5)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이 놀라운 창조 세계의 온전한 회복을 기다립니다.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릴 뿐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Mon, 05 Jan 2026 08:05:4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redirect=11"><![CDATA[묵상의 나눔]]></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믿음대로 살아가라!]]></title>
			<link><![CDATA[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content_redirect=355]]></link>
			<description><![CDATA[2026년은 믿음대로 살아가자(롬 12:1-2)는 주제로 나아갑니다. 
믿음으로 살자는말은많이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보면 우리가 믿음을 말하면서도 그 말과 참 많이 다른 삶을살아가고 있습니다. 

올 해에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삶과 일치되고 우리의 삶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좀 더 담대하고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믿음을 드러낼 때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Sun, 04 Jan 2026 08:59:3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redirect=5"><![CDATA[교회 게시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창세기개관]]></title>
			<link><![CDATA[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content_redirect=354]]></link>
			<description><![CDATA[창세기

고든 J. 웬함(Gordon J. Wenham)


  1. 서론

성경의 첫 번째 책으로서 창세기(헬라어로는 “기원”의 뜻)는 구약의 다른 어떤 책보다 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위한 배경이 될 뿐더러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 중 하나이다. 창세기는 성경을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상황과 신학에 대한 적절한 전제를 갖고 나머지 부분을 읽도록 방향을 설정해준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많은 저자들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오늘날 세속화된 서구에서도 그 이야기와 주제들은 여전히 익숙하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것이 해석에 있어서의 통합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상황에서 유리된 텍스트는 오해와 오용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이 책의 목적은 창세기를 기록 시의 텍스트로서와 정경 속의 주된 증거로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2. 해석의 역사

“창세기의 처음 몇 장은 구약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 기독교 신학의 발전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Louth 36) 초기 기독교 저자들은 신약을 필두로 해서 창조와 타락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의 도입부를 깊이 파고들었다. 첫째 아담의 실패를 승리로 되돌리신 둘째 아담으로서 그리스도를 유형화하는 것은 교부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이해 또한 필수적이었다. 이런 형상은 타락으로 인해 손상되었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새로운 형상으로 이를 되돌리는 것이었다.
상징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창세기를 해석하는 데 있어 중요했지만 이것이 이야기들을 풍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창세기의 내용들은 세상의 기원을 문자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찬가지로 이후의 족장들의 이야기들은 역사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여졌다. 현대과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19세기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성경해석에 어려움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개혁주의자들과 그 계승자들은 창세기를 동일하게 문자적인 방식으로 접근했으며 책의 상징적 내용에는 그리 강조점을 두지 않았다. 당시에는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계몽주의가 동튼 17세기 이후부터 이런 전통적인 관점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신학과 정치에 관한 논문(“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에서 에스라가 모세의 자료를 통해 모세오경을 편찬했다고 주장했다. 창세기에 대한 토론의 결정판은 아스트룩(Astruc)의 『창세기를 편찬하기 위해 모세가 사용한 추측들』(Conjectures on the Memoires Used by Moses to Compile Genesis)이다. 이 책은 창세기가 몇 가지 유사한 자료를 통해 편집되었다고 주장한다. 창세기와 모세오경의 다른 책들이 몇 가지 자료들로 구성되었다는 생각은 19세기에 걸쳐 격한 토론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율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의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서론』(Prolegomena to the History of Israel, 1878)을 재치있게 옹호하면서 한 가지 형태의 문서설이 학자들 간에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창세기를 세 가지의 주요 자료인 J문서(야웨, 주전 950), E문서(엘로힘, 주전 850), P문서(제사장, 주전 500)들로 구성된 것으로 나눈다. 문서설은 이 세 가지 문서가 연속적으로 편집되어 창세기는 결국 모세로부터 800년이 지난 후인 주전 5세기 경에 최종적인 형태를 이룬 것으로 본다. 이는 창세기에 대한 매우 회의적인 접근방식을 수반했다. 족장들의 이야기들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지 않고 “다만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때의 상황을 반영한다…창세기에는 이후의 상황들이 케케묵은 이야기의 형태로 무의식 중에 투사되어 있고 미화된 신기루와 같이 나타난다”(Wellhausen 319).
역사적 회의주의가 족장들의 기록들을 난타하는 한편 과학적 발견은 창세기 1–11장의 전통적인 이해를 훼손시키고 있었다. 초대기독교 저자들은 이 부분을 역사보다는 내러티브 신학으로서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의 연대기를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대주교인 어셔가 7세기에 이미 가정했던 것처럼 지질학의 발전을 통해 지구의 기원이 주전 4004년보다 훨씬 이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문에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해석은 문제를 안게 되었다. 한층 더 진일보한 발전을 통해 창조의 과정은 6일이 아닌 수천만 년이 걸린 것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다 다윈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 1859)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창세기에 나타나는 시간표에 오류가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라는 궁극적인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우연적 변이는 지구 상에 다양한 생명체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손쉽게 설명해 주었다. 창조주에 대한 개념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으며 계몽되지 못한 시기의 미신적 산물이었다.
창세기와 그 신학을 무지한 시대의 그릇된 개념으로 내모는 것은 창세기 6–9장과 흡사한 고대 니느웨의 홍수이야기를 담은 텍스트의 발견으로 인해 정당한 것처럼 보였다. G. A. 스미스(G. A. Smith)가 1872년에 길가메쉬(Gilgamesh)의 11번 돌판을 해독한 내용을 발표하고 그 다음에 책으로 출판했다. 스미스는 회의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그와 다른 사람들이 이룬 업적들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창세기 1–11장을 다른 민족의 창조신화와 비슷한 신뢰성과 권위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게끔 했다. 19세기의 지식인들은 서구과학이 진리의 유일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결론을 지었다.
20세기는 창세기에 보다 우호적이었다. 문서설이 가장 최근의 자료연대를 제시하며 20세기 내내 주도적인 위치를 점했지만 이 자료들 중에 확실한 초기요소들을 발견하기 위한 공동의 시도가 있었다. 알트와 웨스터만은 족장들에게 약속한 내용의 구성요소들은 매우 이른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고고학과 비교셈언어학에 정통한 학자들은(Albright; Speiser; de Vaux) 창세기에 나오는 이름 및 관습과 2000년대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명칭들과 많은 유사점들을 발견했다. 이를 통해 학자들은 창세기의 이야기들이 저작의 시기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역사적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더 회의적인 주장들(Van Seters; Thompson)이 20세기 말에 제기되었지만 고고학적인 증거들은 여전히 창세기의 진실성을 지지해주는 것 같다(Millard와 Wiseman).
창세기 1–11장과 유사한 더 많은 고대문헌들이 발견되면서(수메리안 왕의 목록, 홍수이야기, 아트라하시스 서사시 등) 창세기가 인접문화의 사고를 단순히 재생산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다. 적어도 신학적인 단계에서는 그런 생각들과 격렬하게 충돌하게 된다(아래의 “3. 창세기의 메시지”를 살펴보라).
최종적으로 20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동안 문서설에 대한 많은 반박이 있었다(참고, Whybray). 그래서 이제는 모세오경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전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최종적 형태로서의 정경적 읽기가 창세기를 비롯하여 성경신학의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자료에 관한 많은 토론을 거치지 않고 현존하는 형태로서의 책의 구조와 메시지에 대한 질문으로 학자들을 이끌었다. 이런 작업 중의 일부는 신학적 관심보다는 문학적 관심으로 비롯되었지만 이 책의 신학에 관한 매우 유익한 몇 가지 교훈들을 발견케 해주었다.


  3. 창세기의 메시지

다른 여러 책들과 마찬가지로 창세기는 구성요소들을 분리시켜서 읽으려는 시도로 인해 타격을 받았다. 문서가설을 받아들이는 주석가들 사이에서 이런 경향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J문서에서 하나님을 단순히 신인동형론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은 P문서의 초월적 경향과 대조된다. P문서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반면 E문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경향이 짙다. 구별되는 문서들에 대한 이론과 합쳐진 주석가들에게서 창세기의 신학을 전체로서 파악하고 상충되는 불협화음과 반대되는 여러 목소리들의 화합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창세기를 좀 더 전통적인 시각에서 읽으려는 사람들은 책의 일부분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리스도인 주석가들은 신약과 이후의 신학들의 중요성 때문에 창세기 1–11장에 불균형적인 주의를 쏟는 경향이 있다. 한편 유대인 독자들은 창세기가 유대인들의 기원과 이스라엘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말해주기 때문에 족장들의 이야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하지만 텍스트에 충실하기 원한다면 특정한 부분에 우선을 두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부분들을 살피면서 부분의 메시지를 전체의 그림에 통합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4. 창세기의 구조

창세기의 전체적 일관성은 주의 깊게 펼쳐지는 책의 구조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첫 부분에 나타나는 창조기사(1:1–2:3)에 이어서 동일한 제목(톨레돗, toledoth)을 가진 열 가지 이야기들이 그 뒤를 이어가고 있다. “이것이…의 내력이니”(2:4; 5:1; 6:9; 10:1; 27; 25:12, 19; 36:1). 이 열 가지 부분들은 2–4장과 37–50장과 같은 긴 이야기들과 5장과 36장과 같은 간결한 족보들 사이에서 교대로 나타난다. 야곱과(25–35장) 더불어 아브라함의 역사와(12–25장) 같은 긴 이야기들을 비교해 보면 예표적인 읽기를 시사해 주는 확실한 유사성들이 나타난다. 특히 아담과 노아를 비교할 때 이런 부분은 더욱 자명한데 노아는 분명히 둘째 아담과 같은 인물이다. 아담처럼 그는 전체 인류의 조상이 되며 아담처럼 그는 죄를 범했다(9:20–27).
중심어들은 창세기를 이어주고 통일성을 부여하는 또 다른 장치가 된다. “복을 주다”와 “복”이라는 단어들은 성경의 다른 책들보다 창세기에서 더 많이 사용된다. 창조 시에 하나님은 새, 물고기, 인간,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 하지만 복을 받는 자는 분명 족장들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이름은 “바라크”(barakh, 복을 주다)의 세 자음 중 두 개를 포함하면서 자신이 복을 실현하는 자임을 암시한다. 창세기의 두 번째 중심어는 3:15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이후에 족장들에게 주어진 약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씨” 혹은 “후손”이다. 세 번째로 중요한 단어는 “땅”으로서 1:1에 처음 나타나고 마찬가지로 족장들을 위한 약속에서 종종 나타난다.
이런 중심단어들은 처음 11장을 이어지는 족장들의 이야기와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들은 12:1–3에 중점적으로 나타난다. “복과 복을 주다”는 다섯 번 나타나고 “땅”은 세 번, 전체 문장은 후손들에게 주시는 약속이(큰 민족을 이루고)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창세기 1–11장은 나라들 사이의 혼란한 국면을 말하는 반면 12:3은 아브라함 안에서 열방이 복을 찾게 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다.


  5. 창세기의 구성요소들

창세기의 메시지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부분들이 전체에 어떤 식으로 기여하는가를 매우 자세하게 조사해야 한다. 창세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질 수 있다.

    1.      첫 번째 해설: 창조기사, 1:1–2:3
    2.      두 번째 해설: 원역사, 2:4–11:26
    3.      핵심: 족장들의 이야기, 11:27–50:26

창조기사는 핵심적 내용을 위한 배경을 제시할 뿐 아니라 주제 또한 미리 암시한다.


1) 창조기사

이 뛰어난 서곡은 6일 간에 걸쳐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증거하고(헬라어로는 “헥사메론”〈Hexameron〉, 즉 “6일 간의 창조”라는 제목이 따른다) 창세신학을 처음으로 설명해준다.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말은 만신전의 신들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창조의 주도권을 행사하시고 명령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암묵적으로는 다신론과 태고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을 배제한다.
두 번째로, 창조기사는 한 분이신 이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말한다. 다른 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신들 간의 치열한 싸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단순히 말씀하셨고 빛이 있으며 마른 땅이 생겨나고 바다에 물고기가 가득차게 되었다. 이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이 결과로 나타나는 분이다. 창조시에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족장들에게 말씀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실 바로 그 하나님이다.
세 번째로, 창조기사에서 유일한 하나님은 전능하실 뿐 아니라 고대 세계의 대부분이 숭배하던 태양, 달, 별들과 같은 천체들은 피조물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전체들과 마른 땅과 같은 피조물에 대한 관심은 이것들이 인간 생존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네 번째로, 창조기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의 창조에서 정점에 이른다. 만물은 이런 관점 속에서 지어졌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1:26)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천상의 주인들과 함께 인류창조를 지켜보시면서 다른 피조물의 모든 관심을 인간에게로 이끌어 가고 있다. 인류는 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번성하도록 명령받은 존재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1:28).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바벨론의 사상과 분명하게 대조된다. 아트라하시스의 서사시에서 인간의 창조는 신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기 위한 부수적인 사건이다. 나중에 신들은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해서 인간의 생육을 억제한다. 반대로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시고 그들의 생육을 권면하신다.
마지막으로, 창조기사는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는 하나님으로 결론을 맺는다. 창조기사의 또다른 독특한 특징이다. 여기에서 암시하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들도 또한 안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괴상한 형태의 고대 이방 축제와 휴일들은 안식일로 대체되어서 하나님은 물론 인간과 가축과 같은 모든 피조물들도 안식해야 한다(출 20:8–11; 신 5:14). 그래서 창조의 목적은 쉼과 평안이지 끝없는 활동이 아니다. 이것은 야곱의 축복에서 재차 확인되는 비전이다(49장).


2) 원역사

두 번째 해설 즉 원역사(2:4–11:26)는 창세기 1장의 이상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죄가 지배하는 현재의 세상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 에덴동산은 조화의 장소여서 자비로운 창조주께서는 물, 식량, 동물, 우애와 같은 인류에게 필요한 모든 필요를 공급하셨다. 첫 번째로, 1:28은 인류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 다음에 2:21–25은 결혼의 원형을 그려내고 있다.
하나님은 완전한 신부를 창조하셔서 아담에게 주고 계시다. 하지만 인류에게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세상에서 아담과 하와는 그들에게 주어진 한 가지 금지명령을 깨뜨리게 되고 우주는 혼란의 상태로 접어든다.
상호적 도움과 우애의 관계는 파괴된다. 인류와 동물 사이의 조화는 죽음에 이를 정도의 투쟁으로 바뀐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3:15). 뱀은 머리가 상하게 되고 인간은 발꿈치만 상하게 되리라는 텍스트는 분명 짐승과 악에 대한 인간의 궁극적 승리를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다. 하지만 텍스트의 초점은 피조물 내에서 벌어지는 계속적인 강포함에 있다. 인간은 단지 동물과 투쟁을 벌이는 데 국한되지 않고 잡초 속에서 먹을 것을 수확하기 위해 애써야 하듯이 식물과의 싸움도 이어나가야 한다(3:18). 그리고 이 모든 일의 결과는 사망이다(3:19).
죽음은 4장에서 재빠르게 다가온다. 가인은 아벨을 살해하고 라멕은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77배의 보복을 약속한다. 동족상잔의 비극적 상황은 족장들의 가정이 어떠할지도 보여준다(25–33장은 야곱과 에서의 모습과 37장에서는 요셉의 상황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죄의 강력한 모습은 “그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는 하나님의 말씀(6:11, 13)에서 나타나듯이 창세기 3–11장에서 지속된다. 일단의 상황으로 인해 하나님은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육체를 멸망시키기 위해 홍수를 보내신다.
재차 이 내용은 창세기가 고대 근동의 신학을 거부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길가메쉬와 아트라하시스(Atrahasis)의 서사시들에서는 너무 많은 인간들이 소음을 지나치게 만들어낸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홍수를 보내는 신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창세기에서는 분노 때문이 아니라 죄가 신적 심판의 원인이다. 길가메쉬에서 묘사되는 신들은 자신들이 행한 재난에 두려워하고 상황을 중지시킬 수 없는 존재로 나타난다. 창세기는 모든 문제가 항상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 아래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을 때 홍수는 물러나기 시작했다(8:1).
홍수는 창조한 모든 것을 멸하는(decreation) 큰 일로 묘사된다. 모든 살아 숨쉬는 생물은 죽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1:2, 9)라고 말씀하시기 전의 상태처럼 물이 지구 전체를 뒤덮었다. 이런 파괴의 행위는 재창조의 행위로 이어진다. 다시 한 번 마른 땅이 나타나고 식물과 나무가 생겨났다. 동물과 노아는 방주를 떠나 땅에 다시 거주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아담과 하와처럼 노아는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8:17; 9:1, 7)는 말씀을 접하게 된다. 노아는 순종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자비로 바꾼 새로운 아담이다(8:21; 참조, 6:5–6).
불행하게도 완전할 정도로 의인이던 노아도 타락하게 되고(9:20–21) 그의 죄는 아들의 행동과 얽히게 된다(가인의 상황을 참조하라). 그래서 세상은 다시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고 바벨탑에 대한 또 다른 광범위한 심판에서 절정에 이른다.


3) 족장들

족장들의 이야기는(50:12) 창세기의 도입부보다 다섯 배는 길다. 이는 분명하게 저자의 관심이 어디에 놓여져 있는가를 보여준다. 저자의 관심은 이스라엘과 12지파의 근원이 어딘가를 추적하는 데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 이상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그는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후손들을 창세기 3–11장에 나타난 인류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12:1–3의 약속들은 “복”과 같은 핵심단어가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약속들은 인류에 대한 죄의 결과를 다루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선언한다.
창세기 12장과 이후 장들의 약속에는 네 가지 요소들이 있다. 첫째로 땅이 약속된다(12:1, 7; 13:14–17). 둘째로 이 땅에 아브라함의 수많은 후손들이 거주하게 될 것이다(12:2; 13:15–16; 17:4–6). 셋째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관계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12:3; 17:4–13). 넷째로 아브라함과 후손들을 통해 지구의 모든 족속들이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12:3; 18:18; 22:18). 약속이 나타난 모든 문장들을 세심하게 읽어보면 그 약속들이 반복되면서 어떻게 발전되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반복을 통해 약속은 더욱 구체화되고 분명해진다. “땅”(12:1)은 “이 땅”(12:7)과 “보이는 땅”(13:15)이 된다. 비슷한 전개가 약속의 다른 요소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약속은 창세기의 메시지 가운데 매우 중심적인 것이어서 데이비드 클라인즈(David Clines, 29)는 모세오경의 주제를 “족장들을 축복하는 약속의 부분적인 성취(이는 부분적인 비성취를 암시한다)”로 올바르게 정의하고 있다.
창세기 12–50장에 걸쳐서 거의 모든 개개의 이야기들은 이런 약속과 연관될 수 있다. 족장들은 점차로 가나안에서 땅의 권리들을 획득한다(21:22–33; 23:1–20; 33:19). 그들은 느리면서도 어렵게 아이들을 낳게 된다(21:1–7; 25:21; 30:1). 하나님의 축복은 어리석게 행동하는 족장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서도 자명하게 나타난다(12:10–20; 20:1–8; 28:1–22; 34:1–35:5). 마지막으로 그들을 통해 몇 명의 이방인들이 축복을 받는다(14:15–24; 20:17–18; 21:22–24; 39:3–23; 47:13–25). 클라인즈가 살펴본 바와 같이 창세기에서 이런 약속의 성취는 부분적이다. 이후의 모세오경의 책들 속에서 좀 더 완성되어가는 성취를 볼 수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궁극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여호수아에 이르러서이다. 이야기 전개는 미래로 열려져 있고 희망과 실망을 오가는 분위기이다.
약속들은 창세기 3–11장에 생생하게 그려진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선언한다. 이 약속들은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다시 확인시켜주기도 한다. 노아와 같이 아브라함 또한 둘째 아담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담에게는 에덴동산이 주어졌다.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을 약속받았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땅의 티끌과(13:16) 하늘의 뭇 별만큼(15:5) 많은 자손들을 주시겠다고 확언하셨다. 에덴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함께 거니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며 완전하라는 말씀을 들었다(3:8; 17:1; 참조, 6:9). 이런 약속들에 대한 순종적이며 충성스런 반응을 통해 약속은 궁극적인 성취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서약으로 바뀌게 된다(22:16–18; 참조, 50:24).
족장들 이야기의 길이와 세부적 내용들은 이스라엘과 12지파의 기원이 창세기의 주된 관심사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약속과 이야기 전개와의 관계를 분석하면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그리고 그 관계를 통한 약속된 땅 및 열방과의 연계성)가 한층 더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스라엘이 그 땅의 소유를 주장하는 것을 정당화시킨다. 하나님은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고 가나안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 땅의 권리를 박탈당했다(19장).
하지만 책의 중반에 가서는 부수적인 주제가 명백하게 나타난다. 가장 긴 두 이야기는 25–33장의 야곱과 에서의 불화, 37–50장의 요셉과 형제들 사이의 불화이다. 동족상잔의 투쟁은 원역사(4:1–16)에 나타나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또한 명백하다. 4장에서 갈등에 대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온 땅이 포악함으로 가득찰 때까지 상황은 악화된다(6:11, 13). 하지만 이후의 족장들의 경우에서 꽤나 다른 결말이 있게 된다. 두 이야기는 감동적인 화해의 모습을 보여준다. 에서는 야곱을 만나기 위해 달려가고 그를 두 팔로 꼭 안아준다. 요셉은 형제들을 용서했음을 선언한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33:4; 50:20–21). 많은 경우에 있어서 아브라함과 이삭은 분쟁 시에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했다(13:8–10; 26:17–33).
이 모든 이야기들 가운데 족장들은 화평을 이루고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기를 원하는 자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의 선의는 가인과 라멕의 회개 없는 굳은 마음과 대조되면서 한층 더 밝게 빛나고 있다. 한편 족장들의 경험은 가정과 국가 사이의 용서와 화해는 실현 가능한 일일 뿐 아니라 바람직한 것임을 시사해준다. 또한 자신의 적들이 가까운 친척이든 다른 인종이든 그들을 용서해주고 화해하도록 읽는 이에게 권고하고 있다.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는 약속이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22:18).


  6. 정경 속의 창세기

히브리어 정경과 기독교 정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가장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위한 어조와 방향을 설정해준다. 창세기는 성경의 기본적인 주제들을 간략하고 명쾌하게 설정해준다. 구약에서 창세기를 직접 인용하고 암시하는 일은 드물지만 주된 생각은 도처에서 나타난다. 신약에서는 창세기의 직접적인 인용이 빈번하며 그 주된 생각들은 율법보다 한층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
구약 정경에서 창세기는 종종 “율법”이라 불리우는 모세오경의 첫 번째 부분을 장식한다. 하지만 “율법”은 히브리어의 원래적 의미를 나타내기에는 너무 좁다. 오히려 “교훈”이라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창세기에 나타나는 이야기들은 심오할 정도로 교훈적이다. 하나님의 본성과 인류의 역할 및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역할 행동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모세오경의 다음 책들도 율법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주어진 배경적 이야기가 제시된다.
특별히 창세기와 그 다음 네 권의 책들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창세기는 출애굽기에서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을 위한 중요한 배경적 지식을 알려준다. 창세기가 없이는 출애굽기에서 신명기에 이르는 구성은 이해하기 매우 어려워진다. 특히 족장들과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들에 대한 빈번한 언급들은 매우 모호해질 것이다. 하지만 모세오경 사이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출애굽기에서 신명기는 모세의 전기처럼 보인다. 출애굽기 2장은 모세의 출생을 말하고 신명기 34장은 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편 중간에 나타나는 모세를 통해 이야기 전개상 매우 중요한 인간의 성품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는 모세의 전기라고 하기에는 그 밖의 내용이 너무 많이 나타난다.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창세기와 나머지 책들 간의 관련성을 발견하게 된다. 족장들에게 주어진 약속들은 모세 사역의 기초가 된다(출 3:6–22). 족장들의 다른 경험들은 모세의 삶 속의 여러 사건들을 위한 전조가 된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애굽으로부터 추방된 일은 그것이 마치 출애굽사건임을 암시하는 어투로 묘사된다. 족장들이 우물가에서 미래의 배우자와 조우하게 되는 일은 모세가 자신의 배우자 될 사람과 만나게 될 사건을 미리 예견하는 듯하다(12:20–13:3; 24:15–28; 29:1–14). 이런 특색들은 창세기를 모세의 삶에 대한 단순한 배경 이상의 의미를 갖게끔 한다.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건국한 족장들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면에 있어서 창세기는 이후의 책들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보충해주는 역할을 한다. 희생제사는 출애굽기에서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꽤나 중요하게 다루어지며 창세기에서 족장들은 인생의 중요한 굽이마다 제사를 드리는 자로서 묘사된다. 더군다나 가인과 아벨, 노아, 이삭의 제사는(12:20–13:3; 24:15–28; 29:1–14) 이야기의 형태를 통해 희생의 중요한 원리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율법의 다른 책들이 율례를 통해 비슷한 가르침을 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창세기 1장은 유일신론을 가르친다. 이후의 율법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 “여호와”만을 예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창세기 2장은 이성과의 관계에 대한 족장들의 접근방식을 이야기한다. 레위기 18장과 20장 그리고 신명기 22장과 같은 내용들은 이런 윤리적 원리들이 논란이 되는 상황 속에서 이런 윤리적 원리가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보여준다.
창세기의 주제와 성격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재차 나타난다. 시편은 창조세계를 기뻐하고(시 104편),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성을 한탄하며(시 106편), 족장의 이야기를 다시 말해준다(예, 시 105편). 같은 주제들이 선지서에서도 나타나며 족장들을 가끔씩 언급한다(사 41:8; 호 12장). 전도서 전체는 타락 이후의 인류의 상태를 생각한 내용이며 죽음을 광범위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본다(3:19).
신약은 창세기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결혼에 대한 관점을 정의할 때 예수님은 창세기 1:27과 2:24을 들어 설명한다(마 19:5). 비슷하게 바울도 죄의 본질을 설명하고 둘째 아담으로서의 기독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창세기 3장을 사용한다(롬 3, 5, 7장). 몇몇 기자들은 아브라함을 믿음과 순종의 모델로 내세운다(롬 4장; 히 11:17–22; 약 2:21–23). 그리고 성경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비전으로 끝낸다. 강, 생명나무, 금, 보석과 같은 가장 눈에 띄는 특징들 모두가 타락 전의 에덴동산을 떠올리게 한다(계 21:1–22:5).


  7. 창세기와 신학

성경의 다른 부분과 초기 기독교 신학에 대한 창세기의 전반적인 영향은 이미 언급했고 이쯤에서 설명을 잠시 중단해야겠다. 창세기의 주제가 성경신학에 기본이 되며 중요하다는 것만 이야기해도 충분할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권세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오직 한 분 주권적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창세기 1장에 명백히 나타나며 성경 전체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모든 신학의 근간이 된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도 창세기의 초반부에 선명하게 나타난다. 인간은 신들에게 음식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고대 세계의 믿음을 뒤집으면서 창세기는 하나님이 인간과 짐승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고 선언한다. 인간의 복지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2장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신적 관심은 구약 전체를 관통하고 신약에서는 성육신에서 최고조에 다다른다.
하지만 고대 신들의 부도덕성과 현대 신들의 허용적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창세기의 하나님은 도덕적 요구에 있어서 단호하다. 인류의 죄성과 폭력성은 세 가지 형태의 심판인 홍수, 바벨에서의 만국의 흩어짐, 소돔의 파괴로 이어진다. 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의 윤리적 성품을 확인케 한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 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죄를 관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인류의 희망이 되면서 동시에 문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악이 궁극적으로 승리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점에서 인류의 소망이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창세기가 가장 의로운 자들도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창세기는 소망 속에서 미래를 내다본다. 족장들에 대한 약속은 마침내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12:3). 창세기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결국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확언한다. 기독교가 나타나기 전부터 이 구절(3:15)은 메시아적인 의미로 정확하게 읽혔다. 현존하는 인류의 상태에 대한 창세기의 단호한 현실인식은 미래의 구속에 대한 확고한 희망을 통해 빛을 발한다.
마지막으로 33장과 50장의 용서와 화해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창세기는 인간사회를 향한 길을 제시한다. 이로써 원수를 용서하고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제자도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는 주님의 명령을 기대하게 된다.


고든 J. 웬함. (2011). 창세기. In 케빈 J. 밴후저 (Ed. &amp; Tran.), 구약의 신학적 해석: 구약 각 권 해석 연구 (초판, p 39쪽 – 54쪽). 기독교문서선교회.]]></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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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뇽 R. 제이콥스(Mignon R. Jacobs)


  1. 개관

미가는 내용의 규모가 학자들이 책의 중요성, 해석에 집중된 연구의 양, 신학적 담화에 있어서 그 위치를 결정하는 요인이 아니라는 한 증거가 된다. 여러 가지 대단위들 안에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 개념적 초점, 이 단위들의 상호연관성을 나타내는 여러 형태의 요소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 한 책의 내용은 해석상의 도전에 직면케 한다.
순차적으로 미가는 12소선지서 가운데 여섯 번째에 위치하며 요나와 나훔 사이에 끼여 있다. 다른 책들처럼(예, 아모스, 호세아) 이 책은 예언적 활동을 당시의 통치자들을 언급함으로써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결부시키는 편집적 요소인 표제로 시작한다(1:1). 미가는 주전 8세기에 활동한 선지자로 제시된다. 한편 내용 중의 일부는 바벨론에 대한 언급과 같은 다른 역사적 배경을 전제한다(4:10; 주전 7세기). 미가는 두 개의 대단위와 그 안의 소단위로 구성된다. I. 1:1–5:15(A. 1:2–16; B. 2:1–5:15); II. 6:1–7:20(A. 6:1–8; B. 6:9–7:20). 미가는 일곱 개로 구성된 장 안에서 사마리아에 대한 심판부터(1:6–7) 남은 자를 위한 보존과 용서에 대한 약속의 선언으로(2:12–13; 7:18–20) 움직여 간다.


  2. 해석의 역사

구약의 여러 내용에서처럼 미가는 여러 신학적 해석을 도출했던 다양한 방법론적 접근의 초점이 되었다. 몇몇 초기 연구에서는 명백한 개념상의 긴장만큼이나 해석자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반추의 질문들과 같은 책의 진위성에 중점을 두었다. 19세기의 스테이드(Stade)가 예를 든 것처럼 책의 현존하는 형태에 나타나는 명백한 불일치는(문체, 역사적 상황, 개념적 통일성) 책의 진위성을 의심하는 근거가 되었다. 스테이드는 적어도 세 개의 구별되는 역사적 상황이 있다고 결론내었다. 미 1–3장(8세기); 4–5장과 7:7–20(6세기); 6:1–7:6(7세기)이다.
20세기와 21세기의 학자들은 내용상의 불일치를 인정하면서도 그 관심은 책의 진위여부보다는 전체적인 일관성에 있다. 구성단위의 편집순서를 살펴본 최초의 학자들 중에 하우프트(Haupt)는 현존하는 책의 순서로 인해 비일관성이 나타난다고 관찰했고 원래의 순서를 회복시킴으로써 일관성이 나타날 것이라고 목격했다. 울프(Wolff), 레스코우(Lescow), 바게나(Wagenaar)를 포함하여 후대의 학자들은 여러 가지 편집상의 누적, 이들의 역사적 상황, 편집의도를 파악함을 통해 책의 구성역사를 분별하려고 시도했다.
메이즈(Mays)는 책의 역사적 상황과 현존하는 형태의 편집의도를 조사하면서 신학적 통일성에 대해 다루었다. 윌리스(Willis)와 핵스트롬(Hagstrom)도 심판(1–3장)과 희망(4–5장)이 번갈아 나타나는 것과 분별가능한 대단위 속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개념들(예, 1–3장; 6–7장에 나오는 죄)과 같은 문예적, 개념적 요소들을 사용함으로써 이에 대한 관심을 표출했다. 제이콥스(Jacobs)는 의미론적 지표들(예, 하타, khatta’ah, “죄”; 페샤, pesha‘, “범죄/허물”), 장르(예, 심판 연설), 책 속에서의 이들의 상호관계에 관한 질문, 구약의 개념적 구조라는 측면에서 거듭 나타나는 개념들을 주목했다.
다비평적 접근도 미가에 대한 방법론적 태도의 일부가 된다. 이 방법들은 책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다양한 비평적 방법을 채택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벤 즈비(Ben Zvi, Micah)는 책의 형태에 대한 관심을 다루었으며 심판이 선언되는 자들(“행악자들”)의 행위를 파악했다. 그는 “독자의 역할”에 대한 문제가 결정적 해석요소인 것으로 보고 관심을 가졌다. 이런 방식으로 독자의 방향성, 억압, 계급투쟁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미가를 사용하는 다른 사람들의 예를 들었다. 2–5장의 구성역사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바게나르는 접근방식의 방법론적 요소가 양식비평과 편집비평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했다. 역사–비평적 분석의 일부로서 앤더슨과 프리드먼은 편집비평뿐 아니라 원문비평을 사용하여 70인역과 마소라사본의 미가를 비교분석하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 모든 접근방식에 있어서 미가가 심판과 소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놓칠 수 없다. 이들은 불의를 시정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종교적 행위는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는 도전과 연관되어 있다.


  3. 내용과 신학적 관심

책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이 외형적 형태의 예배와 회개를 넘어서 정의를 실현할 것을 요구하지만 징벌을 돌리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심판 후에 예루살렘을 회복시킬 것을 약속한다. 죄의 심각성이 더욱 강조되는 것은 제사장이 자신의 역할을 남용하면서 율법을 가르치는 데 있어 타협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사실에서다(참조, 말 1:1–9).


1) 죄와 용서

만연화된 죄의 모습이 관습의 용어와 묘사를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그려지고 있다. 페샤(pesha‘, “범죄/허물,” 1:5; 참조, 6:7), 하타(khatta’ah, “죄”, 1:5; 참조, 3:8; 6:7), 아웬(’awen, “죄”)과 라(ra‘, “악,” 2:1–2; 참조, 3:1–2), 아원(’awon, 남은 자의 “허물”, 7:18)이 그 예들이다. 지도자들과 허물이 있는 다른 자들은 권력을 남용하고(예, 3:1, 5–6) 백성들의 땅과 소유물을 강탈해서 그들을 가난에 빠지게 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2:1–5). 심판은 나라 전체로 확장된다. 미슈파하(mishpakhah, “족속”, 2:3). 하나님은 죄악을 없애고(7:18), 허물을 사유하고(7:18), 죄악을 발로 밟고(7:19),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심으로(7:19) 모든 종류의 죄를 용서하신다(사용되는 용어가 용서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가를 반영한다). 그러한 경우에도 용서는 누구의 죄를 언제 사할 것인가를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참조, 32:1; 36:3; 요일 1:9) 남은 자(셰리스, she’erith; 7:18–20)에게 특별한 것이다.


2) 하나님의 요구

백성들이 만나게 되는 도전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에 대한 이해이다. 첫 번째로 백성들은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고난을 겪지 않는다고 가정한다(3:10–11). 두 번째로 이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요구가 제물을 드리는 것이라고 믿어서 이 요구를 짐으로 바라본다(참조, 암 5:21–25; 사 1:11). 따라서 이들을 희생제물을 드리고 하나님의 마음이 즐겁지는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달래지기를 기대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죄와 제물로 인해 괴로워하신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6:6–8; 참조, 삼상 15:22; 사 1:17; 43:22–24; 호 6:6; 말 1:13). 미가 6장은 하나님이 정의를 행하고, 공동체적 책임을 즐겨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중할 것을 요구하심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6:8). 하나님은 종교적 의식을 거부하지 않으시지만 회개와 정의로 나타나는 순종이 결여된 단순한 외적 행위에 기뻐하시지도 않으신다(사 1:17; 43:24; 렘 6:20; 암 5:21–24; 참조, 딤후 3:1–5).


3) 남은 자와 소망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결단이 바뀔 가능성을 담고 있는 아모스와는 달리 미가에서 심판은 불가피하다. 셰리스(she’erith, “남은 자”)의 정체성은 심판과의 관계만큼이나 많은 관심의 대상이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회복시키고 후일에 새로운 시대를 여실 것임을 약속하신다(4:6–7; 참조, 사 2:2–4). 그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환난에 처하게 한 자들로 구별되는 사람들을 회복시킬 것을 약속하신다(4:6–7). 두 번째로 남은 자는 무죄한 자와 유죄한 자들을 구별하는 데 관심이 없이 형성될 것이다(참조, 사 10:20–22; 11:11). 세 번째로 남은 자는 죄를 용서받고 여호와가 통치하시는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 사용될 것이다. 네 번째로 남은 자는 남왕국인 유다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지칭하는 셰리스 이야코브(she’erith ya‘aqob, “야곱의 남은 자,” 5:7–8[6–7절 MT])로서 지칭되기도 한다(참조, 사 37:31–32). 2:12–13; 4:6–8; 5:9(8절 MT); 7:18–20은 북왕국보다는 이들 그룹을 지칭할 수도 있다. 다섯 번째 남은 자의 특징은 다른 열방들 가운데 일시적이고도 파괴적인 존재로 나타난다는 것이지만(5:7–9[6–8절 MT]) 유다의 모든 남은 자가 하나님의 계획에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참조, 렘 44:12–14).
남은 자의 개념을 살펴보면서 희망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첫 번째로 희망은 파괴의 경험을 통해서 나라가 존재의 모든 양상 속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4:1–5:15[14절 MT]). 두 번째로 회복이 실현되는 종말론적인 관점에 있어서 약속이 주어지는 사람들은 그것을 살아서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참조, 렘 24; 25:9–14).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기다리던 족장들처럼 이스라엘의 믿음의 시험은 현재의 상황이 미래의 비전과 닮은 것이 없을 때 인내하는 데 있다.


  4. 해석적 도전


  1) 응보

하나님은 백성들을 벌하신다. 어떤 이들에게 이 사실은 불의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의 선포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는 죄를 다루시기 위해 심판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희망을 실현하기 위한 사전조건으로서의 심판의 성격과 관계가 있다. 도전 가운데 일부는 하나님이 백성들을 벌하실 뿐 아니라(예, 3:4, 7) 심판 속에는 무죄한 자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예, 2:3–5; 3:12; 호 13:16[14:1 MT]; 참조, 렘 18:19–23). 그 결과 자신들에게 가해진 불의로 인해 황폐하게 된 사람들은 심판의 선포를 통해 더욱 비참해진다. 게다가 죄로 인해 하나님이 나라를 심판하시는 가운데 바벨론과 유다(미 4:10–11, 렘 39장), 앗수르와 유다와 같이(미 5:8–9[7–8절 MT]) 서로를 심판하기 위해 열방을 사용하신다. 이는 예언적, 문예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관점이 현대적 틀 속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상황을 포함한다. 즉, 하나님의 바램, 계획, 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개입하시는 것과(참조, 사 10:12–14; 13장; 43:14; 렘 50장) 해를 주려는 인간의 계획과 동기를 하나님의 계획과 행위와 구별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폭력성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모호하게 주장하는 것은 내재적인 위험이 있다.


2) 하나님의 선택

책 속에서 심판이 예루살렘의 존재에 대한 최종적 선언이 아님을 기뻐할 수 있으면서도 또한 생존한 자, 즉 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하나님은 일단의 생존자들을 보존하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며 남은 자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유죄한 자와 무죄한 자를 구별하시지 않으실 것이다(7:18–20; 참조, 2:12–13; 4:6–8).
한편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회복시키는데 사용될 사람들과(좋은 무화과, 24:2–7) 결국에는 거부될 자들을(나쁜 무화과, 24:8; 29:17; 44:12–14) 구별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을 암시한다. 사람들과 열방들을 택하거나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특권은 선택과 언약적 관계에 있어 중요하다(창 12; 15:2–4; 말 1:2–5).
하지만 하나님은 더 나아가 언약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 안에서 구별을 두셔서 이들 모두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는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참조, 겔 18장; 롬 9:6–9, 11–14장). 이는 그리스도인들 간의 긴장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헌신된 자와 명목상의 신자의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선택은 열방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기로서 사마리아의 황폐와(주전 8세기) 예루살렘 멸망의 틈새로서(주전 6세기) 인식된다. 하나님은 다른 나라를 기꺼이 벌하시면서도 어떤 나라에 대해서든 좀 더 참으시고 인내하신다. 하나님의 선택의 세 번째 국면은 멸망의 도구와 주체로서 사용되는 나라를 선택하시는 데 있다. 그 선택 기준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기뻐하는가와 관련된다.


3) 하나님의 요구

미가의 메시지는 여러 가지 형태의 불의를 조장하면서 종교적 미덕을 자랑하는 공동체에 도전하는 것이다. 미가 시대의 백성들은 단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력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압제한 것으로 고발을 당했다. 그리고 그런 불의는 공동체의 전 영역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가족적 결합은 공동체의 불신에 대항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7:1–7). 모세오경에서처럼 관심은 공동체 안에서 연약한 자들인 과부, 고아,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는 것이다(출 22:21–24; 레 23:22; 신 15장; 사 9:1–7; 11:1–9; 렘 7:5–7; 22:3; 겔 22:7; 말 3:5). 정의를 이룩하는 것은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이 그 힘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지만 교회를 포함한 현대적 환경은 권력의 남용을 용인하는 것 같다. 잘못된 가르침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믿음으로 인정되어 가고 계속적인 불의를 허락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분별하기가 어려워진다(딤후 4:3).


미뇽 R. 제이콥스. (2011). 미가. In 케빈 J. 밴후저 (Ed. &amp; Tran.), 구약의 신학적 해석: 구약 각 권 해석 연구 (초판, p 389쪽 – 396쪽). 기독교문서선교회.]]></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Tue, 23 Dec 2025 00:17:55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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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학개 개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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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R. 하우스(Paul R. House)


구약의 대부분의 짧은 책들에 적용되는 것처럼 학개에 대한 연구는 일반적으로 내용이 긴 책들을 다룬 방식을 따라 이어져왔다. 초기 기독교의 해석은 몇 가지 상징적인 방식으로 내용을 읽는 것에서 나왔다. 여기에는 스룹바벨을 그리스도의 한 모형으로, 회복된 성전을 새 언약의 예언으로서, 스룹바벨의 인장반지를 예수님의 왕적 권세의 상징으로 다루는 것이 포함되었다(Ferreiro). 20세기 초기의 역사–비평적 학자들은 학개의 역사적 참고자료와 그것들이 포로기 이후 시기를 밝혀 주는 빛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들은 책의 진술의 정확성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고 스가랴 1–8장과의 연관성에 주목했다. 또한 편집자 혹은 연대기 기록자가 선지자의 메시지를 기록했고 이를 학개가 활동하던 시기의 짧은 역사에 덧붙였을 가능성을 논의했다. 따라서 학개는 기본적으로 포로 후기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선지자 학개가 행한 사역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다룬 것으로 취급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양식과 편집비평학자들은 이런 발견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고 더 나아가 책의 배경과 편집 수준을 정의하려고 하였다(Beuken; Wolf). 하지만 1980년대까지 몇몇 역사비평학자들은 오랫동안 의견일치를 본 사항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단일 저자에 의한 통일된 작품으로서나(Verhoef; Meyers and Meyers) 적어도 사실상 통일성 있게 편집된 작품으로서(Peterson) 접근할 수 있다는 방식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물론 어떤 전문가들은 이전의 역사비평학자들과 의견을 공유하는 경향을 가졌다(Redditt). 결국 문예적, 정경적 비평학자들은 최종적 형태로서의 책을 분석하는 방법을 찾았다(Childs; House).
전반적인 정경적 상황에서 최종적 형태의 책을 다루는 것은 구약에서 학개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율법과 선지서에서는 이스라엘이 죄로 인해 땅을 상실하는 것과 궁극적으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일부를 그 땅으로 회복시키신다는 것을 강조한다(레 26장; 신 27–28장; 사 4:2–6; 렘 30–33; 겔 36–37장; 호 11:1–9 등). 이런 회복은 때때로 매우 이상적인 용어로 묘사된다(겔 40–48장).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던 혼란스런 시기에 사역을 했으며 각각의 선지자는 나라 전체가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특별히 학개는 성취된 예언, 예언적 말씀에 대한 백성들의 순종, 갱신된 공동체에서 성전의 중요성,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계속적인 축복을 가져오는 다윗 언약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 성취된 예언(1:1)

학개와 스가랴는 동시대 사람들과 가까이 했다. 학개의 메시지는 주전 520년으로 추정할 수 있는 한편 스가랴의 말씀은 주전 520–518년 동안 전달되었다. 따라서 두 선지자는 페르시아가 주전 539년에 최강대국으로서 바벨론 대신 들어선 후 활동한다. 이 사건 자체가 이사야 13:1–14:23, 예레미야 50–51장, 하박국 2:1–20과 같은 구절에서 주어진 약속들이 성취된 것이었다. 두 선지자 모두 고레스의 칙령이 공포되고 첫 번째 귀환이 이뤄진 후에 활동했다. 그의 칙령은 여러 본문에서 약속되고 주전 538–535년에(스1–2장) 일어난 사건처럼 유대인들이 고향땅으로 올 수 있도록 허락했다(사35; 44:28–45:1; 렘 29:1–14).
이런 기념비적인 사건들은 70년간의 이스라엘 포로생활이(렘 29:1–14) 청산되고 이제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다시 거주하고, 갱신된 언약 가운데서 여호와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새 시대로 접어든 증거로 마땅히 간주될 수 있다(신 28:1–4). 예언은 학개가 생존하던 시기에 실현되고 있었고 문제는 성취의 과정이 실제상의 경험에서는 어떻게 보였는가 하는 것이었다.


  2. 예언적 말씀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의 축복(1:2–15)

학개의 백성들은 초기 선지자의 선포 때문에 큰 축복을 기대할 수도 있었지만(1:9) 여호와의 심판을 여전히 경험하고 있었다(1:6). 학개는 이런 상황이 온 이유가 그들이 성전을 완성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 땅으로 귀환케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데 있다고 선포한다(1:2–11). 여호와가 영광을 받지 못하므로 그들은 땅에서의 유익을 받지 못하고 있다(1:8). 자신의 땅에 있기는 하지만 징벌을 당하는 백성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학개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일어나서 성전을 짓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이름으로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따라서 여호와는 그들의 마음과 육체를 새롭게 하여 움직이고, 동기를 주고 능력을 주신다(1:13–14). 이들의 반응은 초기의 선지자들이 인내해야 했던 귀기울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 세대를 분리시키는 것이다(왕하 17장). 그 땅으로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고(1:1) 자연을 통제하시는(1:2–11) 그 하나님이 성전이 상징하는 영광을 누리신다는 것을 그들은 인식한다.
성전재건을 요구하면서 학개는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열왕기상·하, 이사야, 시편에서 발견되는 중앙성소에 대한 강조에 동의한다. 성전은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의미하며(1:12–14; 출 32–34; 왕상 8장) 이스라엘의 헌신과 복종을 보여주는 것이다(1:2–6; 출 35–40; 왕상 5–7장). 학개는 또한 신명기 28:64–68과 30:1–10; 이사야 60–62장; 예레미야 30–33장; 에스겔 40–48장에서 보여주는 미래에 대한 일치된 관점을 가진다. 학개가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는 이유는 여호와가 역사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성전 건축을 이런 미래와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개는 분명히 주전 520년의 사건 속에 자신의 믿음을 정초시키지만 동시에 여호와께서 미래에 하실 큰 일 또한 기대하고 있다.


  3. 성전과 갱신된 공동체(2:1–19)

건축이 진행되면서 현재 지어지는 성전이 예를 들자면 에스겔이 환상에서 본 성전의 아름다움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겔40–48장). 따라서 선지자는 세 가지 기본적인 약속을 가지고 백성들을 권면한다. 첫 번째로 여호와는 출애굽 때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방식으로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다(2:4–5). 여호와는 시내산 언약 혹은 시내산 언약의 대상을 잊으신 적이 없다. 두 번째로 여호와의 영이 그들 가운데 있음으로 어떤 두려움도 제거하실 것이다(2:5). 세 번째로 땅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이 모든 나라의 보배로 성전을 채우실 것이다(2:6–8). 하나님의 임재와 온 세상에 대한 주권은 성전의 처음 영광보다 성전의 나중 영광을 더 크게 하실 것이다(2:9). 그때에 성전을 통해서 여호와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탁월함이 열방 가운데서 두드러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영광은 이스라엘이 정결한 백성이 되지 않으면 나타날 수 없다. 성전건축이 시작되기 전에 이스라엘이 행한 모든 일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부정했다(2:10–14).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가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서 축복하실 것이다. 그들의 모든 필요는 충족될 것이고(2:15–19) 이는 레위기 26:3–13과 신명기 28:1–14에 언급된 복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호와는 그들의 회개를 반기실 것이다.


  4. 다윗의 언약과 새로운 축복(2:20–23)

이렇게 언급된 여호와의 백성들, 성전, 임재를 고려한다면 선지자가 다윗 언약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으로 결론 내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결국 완전한 다윗 혈통의 통치자가 출현하는 것은 갱신에 대한 여러 메시지중의 일부분에 속한다(사 9:2–7; 11:1–9; 렘 23:1–8; 겔 34:20–24 등). 학개는 다윗의 후손이자 이스라엘의 현 지도자인 스룹바벨이 여호와의 손의 “인장”과 같다고 역설한다(2:23). 학개는 스룹바벨이 오실 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는 주님이 다윗 언약을 버리지 않았다는 상징이다(삼하 7장). 다윗의 계보는 끝나지 않았고 따라서 이스라엘에게는 장기적인 희망이 있다. 이 본문은 열왕기하 25:27–30과 같은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포로로 잡힌 다윗의 후손인 여호야긴의 명예가 회복된다. 여호야긴은 약속된 다윗혈통의 통치자는 아니지만 그가 존재함은 다윗의 약속이 지속되게 한다.


  5. 결론

학개의 신학적 통찰력은 과거, 현재, 미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그것은 언약의 약속과 이전의 성경기자의 종말론적 비전에 뿌리 내리고 있다. 또한 언약의 약속과 언약적 순종을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축복에 연결시키고 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지금 순종하는 여호와의 종들과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학개는 성경 전체의 특징을 이루는 삶, 약속, 종말의 “지금”과 “아직”이라는 측면들을 강조한다. 따라서 예언적 약속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접근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둘 다 일대일의 예언 성취라는 단순한 구조보다 더 미묘하다.


폴 R. 하우스. (2011). 학개. In 케빈 J. 밴후저 (Ed. &amp; Tran.), 구약의 신학적 해석: 구약 각 권 해석 연구 (초판, pp 419–424). 기독교문서선교회.]]></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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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8 Nov 2025 07:43:58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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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3 Nov 2025 07:41:23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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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9월 주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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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9월 주보]]></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Mon, 03 Nov 2025 07:39:47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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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에스라 느헤미야서 이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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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에스라 느헤미야 리더쉽 교제인가?]]></description>
			<author><![CDATA[손영배]]></author>
			<pubDate>Mon, 03 Nov 2025 07:37:4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sydneygoodpeoplechurch.com/?kboard_redirect=11"><![CDATA[묵상의 나눔]]></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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